백대환(白大煥)
묘역번호: 2-04
생 애: 1961.05.28 ~ 1980.05.23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지원동 화순간 도로상
기 타: 학생(송원전문대 1학년)
유 족: 백옥기(부)
“엊그제 공수부대원들한테 붙잡혀 계엄사에 끌려가서 죽도록 맞았어요. 그래도 학생이 아니라고 우겼더니 그냥 풀어줬어. 인자 괜찮응게 걱정마.”
송원전문대 1학년이던 대환이는 위급한 상황에서 학생이 아니라고 우겼다. 그러나 시위를 주도하던 대학생이 아니라고 해서 젊은이들을 그냥 두지는 않았다. 나이가 소용없었고, 남녀가 구별되지 않는 그들의 박달나무 진압봉은 대환이의 몸에 한차례 세례를 퍼부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어머니는 안심했다. 아들이 전화를 하고 혼자서 들어가겠노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무사한 것에 감사했다...
21일 계엄군이 외곽으로 빠져나간 후 도청에서는 사태수습위원회가 꾸려지고 광주의 평정을 되찾기 위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상자의 치료와 사망자들의 시신처리는 급선무였다. 도청에 누운, 가족조차 찾지 못한 수많은 사망자들을 조금이나마 편히 보낼 수 있는 관이 필요했다. 관을 구하러 화순으로 가는 그 소형버스에 대환 군 역시 몸을 실었다. 시민군 5명, 여고생 2명 그리고 화순이 집이던 일산방직에 근무하던 여성 노동자 2명을 실은 버스는 화순으로 향했다...
주남마을 못 미친 야산에는 계급장과 소속부대 마크를 떼어버린 장교 한 명과 무전병이 매복해 있었다. ‘폭도’들이 탄 차가 화순 방향으로 향한다는 무전이 전해지고 잠시 후 매복해 있는 군의 시야에 시민군이 탄 버스가 들어왔다. 지원동 1번 버스 종점을 지날 즈음 사격지시는 떨어졌다...
아들이 사라진 날짜와 시간과 엇비슷한 시기에 지원동 근처에서 사상자가 많이 났다는 입소문은 대환 군의 어머니의 귀에도 들렸다. 지원동 1번 종점에서 이발소를 하는 아저씨를 찾았다. 그는 공수부대의 한바탕 총격이 있은 후 소형버스는 군 트럭이 와서 끌고 가버렸고, 차에 탄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 거라며 어머니의 희망을 꺽어버렸다. 버리고 싶지 않은 아들의 생존에 대한 희망을 더는 붙잡지 못하고 시신만이라도 찾고자 아버지와 종합병원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아들의 행방을 알았다. 5월 여행지에서 부랴부랴 돌아와 찾기 시작한 아들을 6월 중순이 되어서야 망월동 묘지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름 대신 ‘검증 7호’라는 푯말이 꽂힌 묘지 앞에 섰다...
관에는 물이 가득하고, 얼굴과 몸은 부패가 심해 퉁퉁 부어올랐다. 머리는 수박덩이만 해 보이고 머리카락도 다 빠져 하나도 없었다. 얼굴은 까맣다 못해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가슴은 총에 맞아 뻥 뚫려있는데, 그곳엔 희멀건 구더기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옷도 입지 못하고 발가볏겨진 채였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