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례(金春禮)
묘역번호: 1-100
생 애: 1962.03.07 ~ 1980.05.23
성 별: 여
출 생 지: 화순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지원동 화순간 도로
기 타: 공원(일신방직)
유 족: 김이두(오빠)
“언니야, 우리 화순 가자. 언니도 집에 가야잖어. 엄니 아부지도 걱정하실 것이 아닌가. 우리 할아부지 제사라 나도 화순 가야 써.”
김춘례와 고영자는 기숙사를 나섰다. 김춘례는 큰오빠가 살고 있는 화순에 가서 할아버지 제사를 모셔야 했다. 그녀들이 다니고 있는 일산방직은 기계를 멈추고 직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시외가 집인 사람들은 차가 끊겨서 집에도 갈 수 없어 애만 태우고 있었다. 마침 춘례가 음력 4월 10일이 할아버지 제사라면서 화순에 가야한다고 집이 화순인 고영자를 설득했다. 그날이었다. 5월 23일, 그들은 함께 길을 나섰다. 두 여공은 걸어서 지원동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화순에 시신을 넣을 관을 구하러 가는 시민군의 차가 지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차를 세워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 차에 올라탔다...
시민군 9명과 여공 둘을 실은 소형버스는 화순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지원동 주남마을을 지나던 이들의 귀에 총소리가 들리고 덜컹이는 버스에 집중적으로 총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민군들이 맞대응을 해 총을 쏘아보지만 양쪽 산에 매복해 숨어 총을 쏘는 계엄군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차는 금세 벌집이 되었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피를 쏟아내고 숨져갔다. 총에 만신창이가 된 버스 안으로 계엄군들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고, 이미 목숨이 끊어져 가는 이들을 향해 다시 총을 쏘았다...
열여덟 살 여공 춘례의 숨이 끊겼다. 부모의 가난으로 못 배우고, 못 입고, 못 먹고 고생만 하며 살았던 춘례, 그러나 꿈이 가득했던 소녀는 그렇게 갔다. 춘례의 가슴을 관통한 M-16 총탄은 그녀의 등에 12센티미터에 이르는 총창을 냈고, 하복부는 총에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피범벅이 된 얼굴과 머리카락에는 또 흙이 엉겨 붙었다. 5일 뒤 오빠 김이두 씨가 그녀를 보았을 때 춘례의 모습은 그랬다. 거기다 총상이 나 있는 등이며 하복부는 새까맣게 썩어가고 있었고, 손가락 마디만한 구더기들이 들끓고 있었다...
“우리 춘례가 차말로 죽어부렀다냐. 차말로? 아이고, 춘례야, 춘례야……. 너 안온다고 니기 할아부지가 노하기라도 하신다니, 이것아! 아이고, 뭣할라고, 뭣할라고 그 위험한 디를 온다고…….”
어머니는 가슴에 맺힌 피멍을 풀 길이 없었다. 매일매일 술과 함께 했다. 그래야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다. 아니, 술의 힘을 빌어 더욱 마음 놓고 딸을 그리워했다.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워 몸은 점점 주저앉고 어머니는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춘례가 떠나고 5년을 마음의 고통과 육체의 병에 시달리다 이 땅을 떠나셨다...
춘례를 이장하고 돌아온 얼마 뒤 엄청난 비가 내렸다. 배수가 좋지 않았던 묘역에 물이 차고 가엾은 넋들이 또 비에 철철 젖어들었다. 이미 죽은 춘례의 고통이 왜 끝날 줄을 모르는지 답답하기만 한 오빠의 가슴에도 비가 내려야 했다. 늘 그런 식이었다. 고통 받아야 하는 이들은 역사의 죄인들이 아니라, 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다. 늘 분하고 답답한 것도 희생자들이고 그의 가족들이다. 늘 그렇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