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고등학생때, 어떤 영어선생님이 이과반인 우리반에 들어와서
"공돌이들이 뭘 하겠냐 기름칠이나 하지" 란 말에 크게 분노한 적이 있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 말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으나, (우선, 기름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는 말이다.)
그 말에는 공돌이는 공대적 지식만 쌓을 뿐 사회 정치 적인것에 무관심하다는 비판도 깔려있다고, 애써 그 발언의
수준을 높여 생각해 보았다.
그 말에 나는 그들을(그들이 누군지는 나중에 밝히자) '배부른 혁명가'라는 단어로써 맞서고 싶다.
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일정수준 이상의 지각만 가지고 있다면 가능하다.
지하철을 타면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땅의 빨갱이.. 간첩.. 통일..' 운운하며 현 정치를 비난하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들이 어찌 개가 달을 보고 짖는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배부른 혁명가라는 말은 영화 콘스탄틴 가드너에서 나온 말이다. 미군의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여인을 향해 남자 주인공은 처음에
저 여자도 말로만 부르짖는 '배부른 혁명가'겠거니 생각한다.
그들은 법정스님의 시집이나 체 게바라의 자서전 한 권 읽고는 무슨 대단한 사상가나 되는것처럼 행동하고
세상이 썩었다며 자괴감에 빠져서는 함께 모여서 소리를 지르고 글을 쓰고 무리를 만든다.
세상이 썩긴 썩었는데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들보다는 차라리 화려한 사상적 무장 없이 생존권을 위해 강렬히 싸우는 노동자들이 훨씬 진실하다.
우리 공돌이들은, 책과 실험장치속에서 진리를 찾아간다.
겸허해지고, 또 겸허해져서 자연에게 그 무한한 진리의 작은 한 단면만을 보여달라고 하루 종일 통 사정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의 작은, 아주 작은 단면을 엿보았을 때 눈물을 흘릴 정도의 기쁨을 누린다.
또한 우리는 안다.
우리가,
치열한 삶을 살고 있음을
성실한 삶을 살고 있음을
유익한 삶을 살고 있음을
기름칠 안하면 작게는 자동차에서부터 크게는 발전소까지 모두 작동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