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崔勝熙)
묘역번호: 1-92
생 애: 1960.10.04 ~ 1980.05.22
성 별: 남
출 생 지: 목포
사망 원인: 칼빈 총상
사망 장소: 도청앞 총상후 전남대병원
기 타: 대학생
유 족: 최애경(매)
“아이고 학생 같기만 해도 다 때려 죽인담서. 광주 사람들이 다 죽는다고 세상이 난리여. 승희야 여기 있으믄 너도 무사허지 못해야. 긍게 엄마랑 집에 가 있자. 가서 잠잠해지믄 다시 와라.”
그러자, 하숙집 주인이 막아섰다.
“바깥에는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방에서 공부만 한디 뭣이 위험하다고 그요? 시방 데리고 가는 것이 더 위험헌께 그냥 냅두시오. 내가 못나가게 콱 붙잡고 있을랑게 걱정허지 말고 지비나 몸 조심해서 내려가시오.”
어머니가 목포로 내려가시고 승희는 집 밖에는 나가지 않았다. 책상 앞에서 조용히 책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21일 하숙집 주인의 점심 먹으라는 소리에 아무 대답이 없었다. 오전까지 방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승희는 그새 나가고 없었다. 입고 있던 츄리닝 채로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승희는 하숙집 사람들에 의해 병원에서 상무관으로 옮겨지고 깨끗하게 수의까지 갈아입었다. 그러나 시외전화가 두절된 상태에서 목포의 어머니와 동생에게는 소식이 전해지지 못했다. 5월 24일, 철도청 직원이 승희의 집을 찾았다. 전화가 안 되는 탓에 철도청의 비상 연락망을 통해 승희의 집에 연락을 취한 것이다. 목포 시내에서 시위가 잦고 위험한 탓에 학교들이 휴교를 했다. 여동생 애경이가 혼자 집에 있었다.
“최승희 집이 맞소? 지금 광주에서 전화가 왔는디, 시체가 썩어간다고 얼른 찾아가라고 합디다. 뭔 난린지 원….”
어머니마저 앗아간 오빠의 죽음을 밝혀내기 위해 그녀는 유족 2세들의 모임인 5월청년동지회에 가입해서 열심히 일했다. 특별한 이념이 있어서가 아니다. 민주화니 뭐니 하는 것도 그녀와는 먼 소리만 같다. 그저 내 피붙이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기에, 그 한 사람의 죽음으로 어머니마저 잃어야 했기에, 폭도라는 이름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열심을 부렸던 것이다. 그리고 유족회 어른들을 만나면 엄마를 만나는 것처럼 포근하고 따뜻해서 좋았다. 오랜만에 얼굴을 대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그저 편하고 응석을 부려도 좋았다. 친정이라는 것이 그녀에게도 있었다면 아마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