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열(閔炳烈)
묘역번호: 1-76
생 애: 1949.05.11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화순
사망 원인: 자상
사망 장소: 전남대학교
기 타: 운전사(정광교통)
유 족: 이영희(처)
전남대학교 정문 양편 잔디밭에 텐트를 치고 있던 공수부대의 병력이 증가하면서 19일부터는 이학부 건물에서 숙식을 시작했다. 구금되어 있던 연행자들은 복도 곳곳에서 공수들의 대검과 만나야 했다. 보는 것만으로 등골이 오싹했던 서슬 퍼런 대검은 그 위력을 감추지 않고 유감없이 과시하기 시작했다. 20일 밤 이학부 교실에 들어선 공수들은 교실 안의 시민과 학생들을 모두 무릎 꿇리고 15도 각도의 상공을 응시한 자세로 묻는 말에 대답하게 했다. 시선 하나 흐트러져서도 안 되고 신음소리도 내서는 안 되었다. 즉시 진압봉과 개머리판이 날아들었기에 시민들은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사방에서 예측할 수 없는 군홧발이 날아들었고, 진압봉과 총의 개머리판은 닥치는 대로 찍고 내리쳤다. 숨소리도 크게 낼 수 없었고 화장실마저 대여섯 명이 굴비처럼 엮여 함께 가야 했다...
20일 민병렬 씨는 여느 때처럼 출근했다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과 함께 오전을 보낸 그는 점심을 먹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오전에 보았던 시내의 상황이 궁금했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어가고 있다는데 그냥 집에만 있으려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시내에 나가 시위를 지켜보던 민병렬 씨는 계엄군의 손에 붙들렸고 몰매를 맞고 전남대학교로 끌려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죽어 21일 외곽으로 퇴각하는 군인들의 트럭에 실려 교도소로 끌려가 암매장되었다...
이영희 씨의 나이는 스물여섯이었다. 행복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한 젊은 여인이 남편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가냘픈 몸으로 두 아이를 길러야 했다. 어디에 원망을 할 것인가. 누구를 붙들고 하소연을 할 것인가...
1990년에 민병렬 씨의 보상금으로 1억 2천만 원이 책정되어 나왔다. 이영희 씨는 딸들의 교육을 위해서 그 돈으로 자그마한 식당을 하나 시작했다. 그리고 1997년 신묘역이 새로 단장하고 남편을 다시 자신의 곁으로 모셔올 수 있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눈물이 그날 다시 터졌다. 남편의 유골은 턱이 시퍼렇게 변색돼 있었다. 맞아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머리며 목, 가슴 등의 뼈들도 으스러져 있었다. 뼈가 그 지경이 되도록 맞았다니, 그렇게 맞다가 숨을 거둔 남편을 생각하니 남편을 묻던 그날 느꼈던 고통이 다시 살아나 가슴이 저리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비정한 것이 세월인가 보다. 많은 것이 묻히고 사라져 새로운 것들이 그 자리를 채워간다. 둘째딸 혜영이가 아버지가 죽어간 그 대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한 자락도 가지고 있지 못한 딸들이 그렇게들 자랐다. 어느새 세월은 그만큼이나 멀리 와 있는 것이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