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마치며...
작년 8월 몽골리아를 시작으로 어느새 1년 반이 되었다.
어차피 언제 어디서 정확히 끝낼 지 모르는 상태에서 여행을 했기 때문에
여행을 마친다는 것 자체가 감이 안잡히는 일이었고,
과연 이 여행이 끝나는 날이 오긴 올까 궁금했었다.
그만큼 나는 여행을 살고 있었다.
지도를 펼쳐 끊임없이 어디론가 이동하고,
매일마다 싼 음식과 잠자리를 구해야 했으며,
무거운 카메라는 항상 목이나 어깨에 걸려 있었다.
길에서 만나는 친구들과는 항상 헤어짐이 기다리고 있었고
대부분이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풍경이나 유적지, 건물을 만나면 감동과 영광이 넘치기 보다는
남대문 쳐다보듯 담담했으며,
그곳을 지나 다른 시공간에서야 내가 찍었던 사진을 보며
내가 그런 엄청난 곳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그때야 놀라 온몸을 부르르 떨곤 했다.
사실 여행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여행자체는 관심 밖에 있었다.
그보다는 내 자신, 특히 긴 여행을 마 치고 난 뒤의 내모습이 과연 어떨까 궁금했다.
누구나 그렇듯 이런 긴 여행을 마주하게 되면 자아의 재발견이라던 지,
꿈의 실현이라던 지, 일생 일대의 큰 전환점이라는 지, 세상을 배우러 간다든 지 식의
거창한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정말 뭔가 대단한 놈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여행을 하다 보니 이런 거창한 기대는 여행을 거창하게 만들기 보다는
오히려 내 자신을 옥죄는 강박이 되어,
어느 순간 여행을 하며 즐기는 것 보다는 여행을 활용하고, 이용하고 있는 날 발견했다.
역시 관건은 집착과 욕심을 약간 버리는 것이었다.
무슨 부처의 가르침과도 같은,
한국에 있었으면 백날 들어도 못알아먹었을 이 원리를 이 여행중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슬슬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를 보자.
그렇게 궁금해 하던 긴 여행을 마친사람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아무리 뜯어 봐도 난 여전히 그대로인 나다.
여전히 욕심 많고 가식적인 나.
하지만 여행 전, 후의 사람은 똑같을 수가 없다고 누군가 그랬다.
그럼 도대체 이 여행은 나에게 무얼 준 걸까?
그건 바로 이 여행, 그 자체다.
지난 수많은 경험과 추억들.
지금도 눈을 살짝 감고 숨을 크게 들이 마시면 돌돌 말려 있던 세계지도가 후후룩 펼쳐지며
이곳 저곳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들리고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그 많은 이야기들의 주인공이자, 조연, 관찰자, 혹은 감독이었던 것이다.
평생 떠들어도 못 다할 그 이야기들.
그렇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직접 겪으며 뭔가가 조금은 변한 것이다.
얼마전 미얀마 바간이라는 동네에서 탑 위로 올라가 저멀리 지는 해를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내가 이 지구에 태어났을 때부터 주어진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마치 긴 우주여행을 마치고 기어코 목성을 찾아가 부딪혀 장렬히 산화한
슈메이커-레비 혜성의 마음처럼,
나도 그 렇게 의연해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란 걸 안다.
내겐 또 다른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해가 산 뒤로 넘어가고,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아래를 내려다 보니
내가 타고 온 자전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1년 이상 세계여행을 하는 건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꿈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난 누구보다 축복받은 놈이고 그래서 지금 너무나 행복하다.
한국행 비행기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있는 지금 나는 정체가 불분명한 자신감으로 꽉 차 있다.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각박하고 치열한 삶을 살게 될 지라도 나는 전혀 두렵지 않다.
그저 잠시 눈을 감고 지난 여행을 떠올리면 순간이나마 무한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또 하나의 긴 여행을 떠나는 거다.
최소한 이번 여행에서는 숙소를 구하러 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그렇게 먹고 싶어하던 한국 음식들이 널려 있지 않은가.
지난 여행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 자연물들,
한국에 있는 사랑하는 여자친구, 가족, 친구, 그외 나를 응원해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또한 여행중 수많은 위험에서 날 지켜준
알라신, 부처님, 하나님, 예수님, 수많은 힌두신, 역시 수많은 토속신들께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아이컵 두번 잃어버린 것 빼고는 이 험난한 여행을 묵묵히 견뎌 준 내 분신과도 같은 카메라.
정말 수고했다.
왜 눈시울이 뜨겁지?
-2006-12-14, 방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