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표(洪仁杓) 묘역번호: 1-64 생 애: 1960.10.01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총상 사망 장소: 남동 광천주조장앞 도로 기 타: 화랑 점원 유 족: 홍선표(형) 5월 15일경부터 홍인표도 시위에 참여했다. 걱정이 된 형이 동생을 찾아 붙들어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젊은 놈이 어떻게 그냥 앉아 있겠냐!”는 것이 인표의 말이었다. 그러더니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되었다... 경표 씨는 달음박질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는 시신들을 군인들이 트럭에 싣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정말로 인표가 있었다. 죽는 순간 얼마나 놀라고 황당했던 것일까. 인표는 눈도 감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동생을 품에 안은 경표 씨는 여전히 동그랗게 뜨고 있는 동생의 눈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배달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이 난리통에 동생을 내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머리에 총알이 관통해 온통 으깨어진 동생의 머리를 끌어안고 경표 씨는 포효하고 있었다... 5월 항쟁을 이 지역 출신의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단순한 지역문제로 협소화시켜 지역감정에 편승시키려는 의도적 계획에 경표 씨가 말려들었다. ‘광주에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기 위해 경상도 군인들이 내려왔다’는 유언비어가 그 봄에는 끊임없이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의 머리채를 낚아채어 흔들고 발로 밟으면서 경표 씨는 그렇게 절규하고 있었다. 부인 손영희 씨는 더 견딜 수가 없어서 부산 친정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없는 집은 난장판이 되었다. 경표 씨는 여전히 술 속에 빠져 살았고, 아이들에게는 “엄마도 아니니 만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경표 씨는 그렇게 정신과 몸이 모두 망가지고 있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막내동생은 차라리 아들 같았다. 그런 동생이 자신의 심부름을 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는 자책은 그를 그렇게 심하게 망가뜨렸다. 하지만 그 시간마저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자신과 주변을 아프고 힘들게 하던 그는 1983년 겨울 어느 날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내 자식 둘을 죽인 년아!” 눈에 힘을 주어 말하는 시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그분의 정신까지 이상해진 것은 아닌지 손영희 씨는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살려하지 않는 시어머니 때문에 한동안은 같은 계림동에 살면서도 따로 떨어져 지내야 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현린[玄潾]
2006-12-02 1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