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규(洪性奎) 묘역번호: 1-63 생 애: 1947.10.10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타박사 사망 장소: 장소 불상 기 타: 음악감상실 유 족: 홍기표(부) 충장로 1가의 ‘오솔길 음악감상실’은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에게 휴식과 토론의 장을 마련해 준 공간이다. 그곳의 사장 홍성규 씨는 시국을 염려하는 젊은이들을 자주 접할 수 있었고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현 정세가 얼마나 불안한지 알고 있었다. 특히 자신의 모교인 조선대학교의 후배들과 YMCA독서회의 학생들과는 절친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그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던 선배였다. 1980년 5월, 계엄군이 광주에 몰아닥치고, 모든 대학들에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오솔길’을 드나들던 후배들과 홍성규 씨는 안에서의 시국토론에서 벗어나 시위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 그런데 성규 씨는 그때, 전대병원에 누워있었다. 아직은 숨이 남아 있는 채로 있었다. 20일, 시위의 선두에 섰던 그는 계엄군의 진압봉에 뒷머리가 깨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았다. 그리고 시민들에 의해 전대병원으로 옮겨졌다. 후두부를 강하게 맞은 그는 수술이 필요했다.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깍고는 수술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밀려드는 부상자들로 병원은 북새통을 이루었고, 환자를 돌볼 의료진은 턱없이 부족했다. 성규 씨의 수술 순서는 좀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누워있는 성규 씨를 가족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피딱지가 더덕더덕 앉아 있고, 맞아서 퉁퉁 부은 그의 모습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가족들의 눈길이 걷혀 가는 것을 어쩌면 성규 씨는 보았을까? 살아있는 성규 씨를 놓친 가족들은 그가 죽은 뒤에서야 그를 다시 찾아갔다. 수술의 순서만 기다리던 성규 씨는 결국 자신의 순서가 올 때까지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가 다쳐서 들어오고 이틀이나 지나도록 그는 수술을 받지 못했다. 약과 의료진만 충분했더라면 그때 저 세상으로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사람은 성규 씨뿐이 아니었다. 가만히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던 성규 씨는 싸늘히 식어 병원 뒤뜰에 내팽개쳐졌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현린[玄潾]
2006-11-29 2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