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봉(許 捧)
묘역번호: 1-62
생 애: 1956.12.09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자상
사망 장소: 장소 불상
기 타: 이발사
유 족: 허 열(형)
1978년 광주 서구 광천동에 박기순을 중심으로 한 들불야학이 설립되었다. 대학생 강학들은 어려운 형편에 낮에는 직장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 어린 학생들과 때를 놓친 이들의 학과 공부를 돕고, 사회의 부조리와 노동자로서 찾아야 할 꿈에 대해 서로 배우고 가르쳤다. 들불야학의 학생과 교사들은 1980년 광주항쟁 당시의 일꾼들이었다. 투사회보를 만들어 배포하는 일에서부터 계엄군의 잔학성을 시민들에게 알려내는 홍보 일을 주로 맡았다. 거리 곳곳을 누비며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 노태우 타도"를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가 1980년 5월 광주의 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었고, 허봉과 허오제 형제가 그 치열한 현장에 있었다...
광주항쟁이 시작되고 허봉과 허오제는 더욱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5월 19일 시위대에 동참하여 게릴라식 항전을 하던 허봉과 허오제는 황금동 콜박스 앞에서 공수부대원과 심한 몸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그날까지는 무사히 집으로 귀가를 할 수 있었다. 공수들의 잔학성이 심해지고 시위대는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형과 늘 함께 하던 허오제는 20일에는 형과 헤어져 아세아자동차 차량 탈취에 동참했다. 그곳에서 탈취한 지프차와 무기 등을 가지고 계엄군과 대치하던 허오제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저녁 무렵 허오제는 형의 친구에게서 형이 전일빌딩 앞에서 죽어있는 것을 보았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전일빌딩 앞으로 달려갔으나 형의 모습은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도 누구도 허봉의 행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사방으로 수소문했으나 형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시간만 흘렀다. 5월 24일경 학생들에게 조선대 뒷산에 시체가 묻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길로 허오제와 학생 몇 명이 청소차 한 대를 몰고 조선대 뒷산으로 올라갔다.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시체 열여섯 구가 묻힌 장소를 찾아냈다. 그곳에 허봉이 있었다. 동생과 헤어질 때 입고 있던 쑥색의 점퍼 차림에 동생이 주었던 전자시계를 차고 있었다. 처참했다. 온 몸은 멍투성이였고, 머리에는 대검에 찔린 구멍이 나 있었다. 계엄군의 발길에 채이고, 몽둥이에 두들겨 맞고 대검에 머리를 찔린 것이다. 그리고 야산에 버려진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의 머리에 검을 찔러 넣어 구멍을 뚫어놓을 수도 있을까. 형의 처참한 몰골을 본 허오제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점퍼와 시계가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자신의 형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것 같은 형의 시신을 붙들고 하염없이 울었다. 하지만 그렇게 울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 곳곳에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의 번뜩이는 눈이 있을 것이었다. 눈물을 훔쳐내고 시신을 도청으로 옮겼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