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미애(崔美愛)
묘역번호: 1-60
생 애: 1957.02.06 ~ 1980.05.21
성 별: 여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중흥동 자택 앞길
기 타: 가정주부
유 족: 김현녀(모)
20일, 밤을 새워 시위를 벌인 시민과 학생들은 시내 일원에서 계엄군을 몰아냈다. 21일 아침부터 금남로에 모여든 시민들은 도청에서 계엄군을 몰아내고 협상을 벌이기 위해 시위를 했다. 한 무리의 시위대는 대학 내의 계엄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남대로 향했다...
최미애 씨는 집을 나섰다. 제자들이 시위에 나서고 있는 것 같다면서 학교에 나가봐야 한다고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시간에 대한 관념이 분명했던 사람인지라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마중을 나간 것이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시위대와 계엄군의 교전이 한창이었다. 최루탄을 피해 흩어진 시위대가 돌멩이를 집어 들고 공격을 가하자,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공포탄을 쏘고 급기야는 M16을 갈겨댔다. 총에 한 학생이 맞았고 피를 흘리는 그 학생을 군인 둘이 달려들어 다리 하나씩을 잡고 질질 끌고 갔다. 죽었을 듯한 학생의 머리가 바닥에 닿아 털털거리는데 군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모여 있는 시민들이 소리를 질렀다. 학생을 놓아달라고, 동생 같고 아들 같은 학생을 놓아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다시 계엄군을 흥분시켰다. 뒤돌아선 계엄군은 다시 총을 갈겼다. 시위대가 아닌 시민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리고 최미애 씨가 쓰러졌다...
딸의 몸은 벌써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데, 불룩한 그녀의 배에서는 아이가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제 죽음도 거부하려는 듯한 아이의 거센 발길질에 최미애 씨의 배는 거세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이만이라도 살려보려는 김현녀 씨는 병원에 연락을 해보았지만 달려와 주는 이는 없었다. 30분을 넘게 요동치던 아이의 몸부림이 멈췄다. 요동치는 최미애 씨의 배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우리 딸이 임신을 해 갖고 총에 맞았는디, 죽은 사람은 있는디 왜 죽인 사람은 없는 것이요? 세상에 나와 보도 못허고 죽은 내 손자는 어쩔 것이냔 말이요? 세상에 임신한 사람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총을 쏘는 그런 짐승 같은 놈들이 어딨냔 말이요? 뭔 죄가 있어서, 뭔 죄를 지었다고 총을 쏴서......”
청문회에서 아버지가 공무원이라는 신분이 드러났고, 직장으로 ‘온전치 못할 것이다’는 협박전화가 몇 번이나 걸려왔다. 집 앞을 형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던 것은 일상이 되어버릴 정도로 빈번한 일이었다. 딸과 손자를 잃은 것만으로도 건강을 잃고 가슴이 무너져 살아갈 힘을 잃은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의 고단한 인생마저 저들은 움켜쥐고 흔들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