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천(曺四天) 묘역번호: 1-57 생 애: 1946.08.08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칼빈 총상 사망 장소: 도청앞 총상후 광주기독병원 기 타: 목공 유 족: 정동순(처) 집으로 돌아오는 20일, 광주교육대학교 정문 앞에서 공수들에게 학생들이 구타당하는 것을 보았다. 조사천 씨는 그들을 뜯어말렸다. 이에 공수들은 몽둥이를 조사천 씨에게로 돌렸고, 놀란 아내는 잽싸게 남편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조사천 씨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결국 밖에 나가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고, 21일에도 인부들이 놀러와 함께 점심을 먹고는 각목을 손에 들고 나갔다. 그리고 계림초등학교 뒤쪽에서 시민들이 몰고 다니던 트럭에 올라탔다... 그녀는 누군가가 알려준 허물어진 담을 통해서 병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가 따라간 길은 영안실로 통하고 있었다. 그곳 영안실에 남편은 싸늘한 시체로 누워 있었다. 총알이 목을 관통했고, 그는 눈을 뜬 채 누워 있었다. 당연하다. 아내와 자식이 눈에 밟혀 어떻게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인가? 아내는 남편의 눈을 바라보다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시체는 썩어서 부어올라 관이 터지고 물이 흘러내렸다. 별수 없이 비닐로 관을 둘러쌌다. 망월동에 그를 안장하던 날도 터져버린 관 때문에 비닐을 벗기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묻어야 했다. 3대 독자였던 조사천 씨는 빈소를 지켜줄 친척 하나 없었다. 다섯 살에 상주가 된 아들 천호만이 상복을 입고 아버지 곁에 사진을 들고 앉아 있었다... 이들 가족에게 내려진 것은, 아버지의 빈자리와 경제적 어려움 그것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있을 때 찍힌 한 장의 사진은 또 다른 고통을 불러왔다. 많은 사람들 기억 속에 강한 인상을 남긴 다섯 살짜리 꼬마의 눈빛에서 사람들은 5월의 아픔을 읽었다. 그런데 정작 주인공에게는 큰 상처로 다가왔다. 천호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지 못했다.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되었기에 가족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쉬쉬했다. 정동순 씨는 5.18민중항쟁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으로 보고 들은 것들을 기억하는 누나와는 달리 천호는 단지 5.18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도 천호는 아버지 안에만 갇혀 있었다. 지금의 자신이라도 그때 아버지처럼 각목을 들고 나섰을 테지만, 그렇지만 아버지가 자꾸 무책임하게 느껴지고 미워졌다.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편찮으시고 과자공장에서부터 시청 일용직까지, 지친 몸을 쉬지도 못하신다고 생각하면 더욱 아버지가 미웠다. 그러다 5.18묘역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게 되었다. 두어 번의 5월 행사를 치르면서 천호는 자신도 유족의 한 사람으로 일을 하고 싶어졌다. 아버지께 진심으로 인사를 올리고 싶어졌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현린[玄潾]
2006-11-14 1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