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신(趙南信) 묘역번호: 1-55 생 애: 1927.11.30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무등극장 부근 기 타: 회사원(광주통신 현장소장) 유 족: 장한수(처) 도청을 둘러싸고 총부리를 휘갈기는 공수부대, 시내 빌딩 옥상에 배치된 저격수들, 그리고 상공을 선회하며 기관총을 발사하는 헬기들, 중무장 상태의 공수들에 의해 시민들은 힘없이 쓰러졌다. 날아드는 총탄을 피해 골목으로 숨어드는 사람들과 너무 놀라 비명조차 터뜨리지 못하며 분노하는 시민들. 참으로 길고 서러운 5월 21일 오후였다... 시신은 이미 입관이 끝나있었다. 하지만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보낼 수는 없었다. 아내는 남편의 관을 뜯었다. 귀 뒤에 작은 총알구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펑 뚫린 턱은 붕대로 막아져 있었다. 붉게 물들어 말라비틀어진 피 묻은 옷을 벗기고 남편이 생전에 입던 양복을 입혔다. 염을 하고 수의를 구해서 입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피 묻은 옷 그대로 입관된 다른 시신들에 비하면, 그나마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힐 수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아야 했다... 막막하던 생계에 빛이 비쳤다. 시청에서 4백 여 만원의 보상금이 나왔다. 부식가게를 차려 아들과 꾸려보려 했지만 장사도 잘 되지 않고 워낙 많은 식구이다 보니 생활이 풀리지 않았다. 짧았던 빛은 사라지고 큰아들과 어머니는 공사장에 나가 벽돌을 나르며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1985년 도지사와 유족회와의 면담이 있다는 소식에 나갔다가 다짜고짜 차에 실려 곡성에 버려진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닭장차라 불리는 죄수 수송용 차에 싣고 한 두 사람씩 1, 2킬로미터의 간격을 두고 쓰레기처럼 부리더니 차는 먼지만 날리고 떠나버렸다. 진상을 밝히고자 뛰어든 투쟁의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그 많은 수모와 좌절은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고, 하루도 걱정이 떠나지 않은 날이 없는 고단한 길을 걸어왔다... 그녀를 또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기억이라는 것이다. 남편 생전의 좋았던 기억들이 이제는 희미해져버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지막에 보았던 남편의 주검이다. 5월 항쟁이 끝난 후, 막내아들이 학원에 다녀오다가 YMCA 건물 앞에 전시되어 있던 아버지의 사진을 보았다. 너무도 처참히 일그러진 모습에 어린 막내아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가족들에게 그것을 이야기했다. 그때 가족들은 땅에 묻은 사람을 다시 꺼내 보는 듯한 마음으로 서로를 붙들고 오열했다. 지금도 그 사진을 생각하면 다리에 힘이 풀리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현린[玄潾]
2006-11-08 1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