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진(田榮鎭)
묘역번호: 1-51
생 애: 1962.02.05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광주기독교 병원
기 타: 학생(대동고 3학년)
유 족: 전계량(부)
놀라 들어와서도 영진은 공부를 했다. 친구들과 영어 과외를 하는데, 혼자만 빠질 수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조금 아껴 쓰면 과외를 받을 수 있지 않겠냐”며 허락했다. 기분이 좋아진 영진은 참고서를 사서 과외 선생님 댁에 들렀다 수업을 받고 오면 5시쯤이면 집에 돌아올 것이라고 하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몇 분 후에 영진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입고 있던 교복을 벗어 냅다 마루에다 패대기를 쳤다.
“엄마, 군인 놈들 좀 봐요.”
책을 사러가려던 영진은 계엄군에게 붙들렸고, 군홧발에 나동그라졌다. 등을 채이고 짓이겨져 그냥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린 영진은 그 울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공부를 하지 못했다. 대학생들이 외치는 민주화가 영진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것을 외치는 올곧은 목소리에 가해지는 군의 폭력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밖에 나가보겠다고 어머니를 졸랐다...
조국이 자신을 부른다는 말을 하는 영진의 눈시울은 젖어 있었다. 방안에도 있지 못하고 마루를 오가며 서성이는 영진의 입에서는 뭔지도 모를 구슬픈 노래가 흘러나와서 어머니의 마음까지 짠해졌다. 그러면서도 20일까지는 영진은 어머니의 말에 따랐다. 그런데 21일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어머니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틈을 타서 영진은 기어이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가족들 중 누구도 영진이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을 찾다가 그만 시신들의 꼴을 보고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병원 안도 아니고, 밖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시신들의 깨지고 부서진 모습에 너무도 마음이 아파서, 다 내 자식 같아서 어머니는 시신을 부여안고 오열했다. 어머니의 가슴에서는 그때의 그 시신들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아서 가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된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관을 사고 알코올을 사다가 아들의 몸을 닦아 염을 해 입관까지 마쳤다. 병원에 아들을 남겨두고 돌아서는 아버지는 술병부터 찾았다. 도청 상무관으로 옮겨지고, 며칠을 그곳에서 아들과 함께 보내는 내내 아버지의 술병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집에 있는 어머니는 아들의 마지막이라도 보아야 한다고 막아서는 가족들을 뿌리치며 악을 써댔다. 가족들은 할 수 없이 상무관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이미 입관이 끝난 영진의 얼굴을 어머니는 보지 못했다. 아들이 누워 있다는 관을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은 떨리는데, 어머니는 너무 기가 막혔던 나머지, 눈물도 흘리지 못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