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춘(林水春) 묘역번호: 1-48 생 애: 1942.11.26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타박상 사망 장소: 학동 자택 부근 기 타: 상업 유 족: 윤삼례(처) 1980년의 피바람이 광주에 불기 전까지 윤삼례 씨는 행복했다. 아니, 5월 18일부터의 계엄군의 살육 앞에서도 그 아픔이 자신에게까지 불어오리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18, 19일 어수선해진 바깥소식을 듣고 남편은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며 아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21일 도청에서는 계엄군의 살육전이 전면으로 드러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광주의 상공에 헬기가 떠다니고 총알이 날아들었다. 시민들이 무장을 하고 계엄군이 퇴각을 준비하는 그 시각, 임수춘 씨는 가족들과 늦은 점심을 들고 있었다. 일찍 숟가락을 놓은 그는 가게 앞의 오토바이를 들여놓아야겠다며 방을 나갔고, 남은 가족들은 천천히 맛나게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당탕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고 비명소리가 났다. 놀란 가족들이 뛰어나갔을 때, 임수춘 씨가 건너편 가게 앞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놀라 뛰어가보니 귀에서 허연 이물질이 흐르고 있고 임수춘 씨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임수춘 씨가 가게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군 지프차 한 대가 다가왔고 그 안에 타고 있던 군인들이 그의 뒷머리에 몽둥이를 휘두르고는 쓰러져가는 임수춘 씨를 그대로 떠밀고 지나가버린 것이다... 남편을 허망하게 떠나 보낸 그녀는 1981년부터 무등도서관에서 근무를 했다. 남편을 잃은 넋을 놓아버린 상태에서 가게가 될 리 없었고, 아이들과 먹고살아야 했다. 그래서 시청에서 소개해주는 대로 일을 했다. 그때, 형사 한 명이 그녀 곁에서 떠나지 않고 감시를 했다. 숫제 출퇴근을 함께 했다. 먹고사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지만 유족회가 발족된 후로 그녀는 생활보다 남편의 일에 더 매달렸다. 가해자가 앞장서서 피해자들을 죄인 취급하는 무법의 세월들을 겪으며 보낸 그간의 시간들을 그녀는 후회하지 않는다. 몸뚱이가 부서지게 아파도 그녀는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남편의 죽음에 대한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 싸울 것이다. 경찰서에 끌려가 죄인 취급을 받으며 심문을 받았던 분했던 기억도 있고, 전투경찰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얻어터진 기억도 있으며, 사람들의 곱지 못한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떨어뜨려야 했던 아픈 기억도 있다. 비록 책임자들이 그대로 석방되어 나와 웃으면서 TV에 얼굴 내미는 꼴이 분통터지게 억울하지만, 그렇게 고생하다 보니, 아무것도 모르며 손가락질하고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광주에서 벌어졌음에,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참 야속한 것은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사람들은 참 빨리도 잊는다는 것이다. 많은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진실된 고백 한 번 받아보지 못했고, 아직도 감추어진 많은 진실들이 있음에도 이제는 잊고 용서하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밉고 야속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잊어 가는 남편이 가엾어져서 그녀는 다시 눈물이 고인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현린[玄潾]
2006-10-21 2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