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균수(林勻洙)
묘역번호: 1-47
생 애: 1959.08.25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금남로 Y다방 앞
기 타: 학생(원광대학 한의학과 2학년)
유 족: 임병대(부)
5월 17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광주에 왔다. 균수는 18일에는 이리로 돌아가야 했으나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각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 돌아가지 못했다. 17일에는 아버지와 광주공원에 가서 법정스님의 시국강연을 듣기도 했지만, 계엄군이 살벌하게 움직이는 18, 19일에는 집에서 형과 부모님과 함께 보냈다. 조선대학교 토목과 교수였던 아버지가, 대학생이면 무조건 잡아들이는 판국에 자식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아무리 젊은 혈기라고는 하지만 대학생이고, 대학원생인 아들들이 함부로 나다니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18일과 19일 이틀 내내 집에만 있었던 자식들에 대한 걱정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독실한 원불교 신자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무 의심 없이 관등행사를 위해서 20일에 순창에 가셨다. 그 틈을 타서 균수는 시내로 나왔고, 금남로에 수십만의 인파가 물결치고 있는 모습에 전율이 일었다...
아침을 먹고 집에 있는 줄 알았던 균수가 어느새 도청 앞에까지 간 것인지 전화를 걸어서는 다짜고짜 시내로 나오라고 했다. 임양수 씨는 서둘러 약속한 우체국 앞으로 나갔다. 형제가 만나서 도청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이 전일빌딩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군의 철수를 기다리며 들떠 있던 시민들을 향해 군은 총탄을 쏟아 부운 것이다. 총소리에 놀란 사람들은 우왕좌왕 어쩔 줄 몰랐다. 금남로는 삽시간에 핏빛 아수라장이 되고, 형제는 서로를 놓쳤다. 형 양수는 놀라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균수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전일빌딩 옥상에서 날아든 총알에 머리를 관통 당했다. 우측 두개골에 박힌 총탄은 아래턱까지 관통했다.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균수는 기독교병원 영안실로 옮겨졌다...
‘한가족, 한마음, 우리’. 균수가 가장 좋아하던 말들이다. 언제나 나보다는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공동체 의식을 제일로 여기던 그는 원광대생들의 시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후배들을 살피고 있다. 1987년 원광대 학생회에서 균수의 뜻을 기리기 위해 학교 광장에 추모비를 세웠다. 학교 측에서는 시위나 집회의 장소가 늘 추모비가 있는 광장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못마땅해 비를 옮길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학생들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셨고, 여전히 그곳에는 임균수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성인들의 동상과 함께 서 있다. 그가 1980년 5월에 도청에 섰던 뜻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삶의 중심이 ‘나’가 아니라 ‘우리’였던 건강한 젊은이의 정신이 그를 그곳으로 데려갔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기억할 것이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