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안산은 산의 형세가 말의 안장처럼 생겼다고 마안산이라 했다. 또 이 산을 대포산과 유방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대포산은 조선 후기 별포군 200명이 대포를 설치한 것에 유래되고, 유방산은 2개의 산봉우리가 여자의 젖가슴과 닮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 정상(148.8m)에 올라서면 사적 제273호로 지정된 복천동 고분군을 볼 수 있다.
복천동(福泉洞)의 유래는『동래부지』성곽조에 의하면, 동래읍성 안에는 우물이 6개가 된다고 하였고, 각면각리원근정도(各面各里遠近程道)조에는 읍내면에 옥미정동(玉未井洞)•대정동(大井洞)•야정동(野井洞) 등의 우물과 관련된 이름이 있다. 이로 보아 복천동을 동래성안의 우물에 비유하는 뜻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근대사회의 우물은 양반댁에서나 볼 수 있으므로 우물이 있다는 것은 복이 넘치는 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뜻에서 옥샘(玉井)은 물의 맛이 좋기로 소문난 우물이었으므로 복천동은 이러한 것에서 붙여져 전해 내려왔을 것이다.
특히 복천동은 복천동고분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고분은 삼국시대 때 이 지역의 수장급 무덤으로 경주지역과 같은 화려한 금은제(金銀製) 유물은 많지 않으나, 대신 철제유물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 그 중에서도 무구류(武具類)가 특히 많아 주목받은 것처럼 그 문화의 번성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옛부터 생활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법정동인 복천동과 칠산동은 1957년 시 조례에 의해 병합하여 행정동인 복산동으로 개칭하여 모든 행정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칠산동(漆山洞)은 삼국시대 동래지역에 거칠산국(居漆山國)이 존재하여 있었는데, 이를 신라가 병합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이라 하였다가 통일신라 이후 경덕왕 때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군(東萊郡)으로 바뀌었다. 거칠산은 '거칠다'의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침 뫼' 즉 황령산(荒嶺山)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되어진다. 삼한시대 소국의 치소(治所)가 동래지역으로 옮겨질 때 주산(主山)의 이름을 칠산(漆山)이라 불렀을 것이다. 이러한 내력과 지금의 동래읍성의 뒷산을 칠산이라 부른데서 연유한 것으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자연마을로는 담뱃대마을, 도화동마을, 광성리가 있었다.
풍수로 본 동래는 계명봉에서 남진한 용맥이 수영강과 온천천을 사이에 두로 뻗어내리고, 두 물이 합수한 지점에서 용맥이 멈춤으로 지기가 매우 왕성한 터이다. 풍수에서 용맥을 타고 흐르는 지기는 물을 만나야 멈추고, 그곳에 바람이 불면 지기가 흩어진다고 하였다. 그런데 동래는 계명봉에서 남동진한 기맥이 계좌산→구곡산→장산으로 이어지며 좌청룡이 되고, 또 금정산에서 금정산성→만덕터널→금정봉→금용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우백호가 되어 장풍의 형국이 양호하다. 동래로 집입하는 수구가 좁고 그 안쪽에 마치 삼각주처럼 평탄하고 넓은 분지에 위치하여, 동래는 대을 이어 부를 이룬 명당으로 판단된다. 『택리지』에서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첫 번째 수구를 꼽았다. 수구가 엉성하면 많은 살림도 여러 대를 이어가지 못하고 저절로 없어진다고 했는데, 좁은 수구는 부지의 내외를 격리시키고, 안쪽에는 들어서면 확트인 경관이 넓게 자리잡아 별천지같은 느낌을 준다. 내부의 땅이 평탄하여 곡식이 풍성하고, 바다가 가까워 해산물도 얻을 수 있으니 땅의 지기는 왕성하고, 장풍이 좋고, 땅은 비옥하면서 해산물도 얻을 수 있고, 수구가 좁아 생기가 흩어짐없이 머무르는 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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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동고분군 福泉洞古墳群 (사적 제273호)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나지막한 구릉 위에 분포하는 삼국시대의 무덤떼.
사적 제273호. 부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이 일대를 거점으로 해서 성장했던 세력집단 지배자들의 공동묘지로 추정된다. 동아대학교·부산대학교 박물관과 부산시립박물관이 수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진행시킨 결과 1991년까지 총78기에 달하는 유구가 조사되었다. 무덤의 구조는 덧널무덤[木槨墓],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 등으로 구분된다. 이중 덧널무덤은 딸린덧널[副槨]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양분되는데, 딸린덧널이 있는 경우 대개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은 일(日)자형으로 배치된다. 구덩식돌방무덤 역시 딸린덧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된다. 딸린덧널이 있는 경우에 으뜸돌방과 딸린덧널의 배치상태는 앞의 덧널무덤과 동일하고 딸린덧널은 나무덧널[木槨]로 이루어지는데 10·11호분과 21·22호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덧널무덤과 구덩식돌방무덤은 이 유적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대형분일 경우에는 막대한 양의 껴묻거리를 껴묻을 뿐만 아니라 으뜸덧널 혹은 으뜸돌방과 딸린덧널에서 순장이 실시되었던 흔적도 엿보인다. 반면 앞트기식돌방무덤은 숫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이 유적에서는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어 가야의 물질문화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토기의 경우 굽다리접시[高杯]류가 많이 발굴되며 이외에 단지[壺], 목단지[長頸壺], 바리모양[鉢形]·통형(筒形)·화로형[爐形]의 그릇받침[器臺]류가 다수 출토되었다. 금속제품으로는 금동관(金銅冠)·금귀걸이[金製耳飾]·유리구슬·곱은옥[曲玉] 등의 장신구류·쇠도끼[鐵斧]·쇠손칼[鐵製刀子]·쇠끌[鐵鑿]·쇠삽날·쇠낫[鐵鎌] 등의 농공구류, 쇠살촉[鐵鏃]·화살통·쇠투겁창[鐵]·대도·삼지창(三枝槍) 등의 무기류, 판갑옷[板甲]·비늘갑옷[札甲]·투구[胄] 등의 갑주류(甲胄類), 말머리가리개[馬胄]·안장꾸미개[鞍金具]·발걸이[子]·재갈[]·말띠드리개[杏葉]·청동제말방울[靑銅製馬鈴]·띠고리[具] 등의 마구류를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청동제칠두령(靑銅製七頭鈴)·미늘쇠[有刺利器]·덩이쇠[鐵鋌] 등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 유적의 연대는 덧널무덤과 구덩식돌방무덤의 경우를 보아 대체로 4~6세기에 걸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복천동 고분은 사적 제273호('81. 6. 9 지정)로 동래 중심가 북쪽에 반달모양으로 에 워싸고 있는 속칭 대포 산의 중앙부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구릉 상에 위치 하는 부산의 가장 대표적인 고분군이다. 1969년 주택공사로 고분군의 일부가 파괴 되어 세상에 알려진 이 후, 1969년부터 1995년까지 동아대학교, 부산대학교 박물관 과 부산시립박물관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발굴에서 4세기 후반대의 분묘도 꽤 포함되어 있어 4 ∼ 5세기대 부산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구조를 비교적 치밀하게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고분군의 연도는 대체로 5세기 중엽에 종료된 것으로 보이며, 금동관이 나온 동아대 발굴조사의 1호분은 규모와 부장품의 질양으로 볼 때 5세기 후엽의 수장급묘로 추정된다. 묘제는 목곽묘와 수혈식석실묘의 2종인데, 대형묘중에는 주곽과 일자형이 되게 목곽형식의 독립된 부곽이 딸린 것이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유구는 모두 130여 기에 달하며, 출토유물은 총 9,000여 점이다. 출토유물에는 토기류 2,500여 점, 철기류(금속류 포함) 3,200여 점, 장신구류 4,010점, 골각기 등 기타유물 10여 점, 이 골 5구, 말 이빨 등 동물유존체(動物遺存體) 7점 등이 포함되어 있다.
경주지역과 같은 화려한 금은제 유물은 많지 않으나 대신 철제유물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 그 중에서도 무구류와 갑주류가 특히 많아 주목된다. 부장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기류는 종류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보물 제598호인 마두식 각배, 오리모양 토기, 등잔모양 토기, 신발모양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부산시에서는 1992년부터 정화사업을 통해 고분군을 사적공원으로 조성하고, 1996년에는 부산시립박물관 복천분관으로 개관하여 복천동고분 군 출토유물 뿐만 아니라 인근 가야지역 및 동시대 일본의 유물도 함께 전시함으로써 가야사 및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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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北)쪽에서 내려오는 구미대지(丘尾臺地)(학소대(鶴巢臺)) 위에 모여있는 고분군(古墳群)이며 1980년 10월에서 1981년 2월까지 사이에 부산대박물관(釜山大博物館)에 의해 27기(基)의 고분(古墳)이 발굴노출(發掘露出)되었고 그 중요성(重要性)에 비추어 주민(住民)들에 의해 추진중(推進中)이던 이 대지(臺地)의 택지재개발사업(宅地再開發事業)은 중단(中斷)되었다.
여기 고분(古墳)은 대지능선상(臺地稜線上)에 남북일렬(南北一列)로 대형분(大形墳)들이 있고 그 좌우(左右)(동서(東西) 각(各) 10m 범위(範圍)의 사면부(斜面部)에도 대형(大形)과 소형고분(小形古墳)이 군재(群在)하는데 능선상(稜線上) 대형분(大形墳)들은 얕은 남(南)쪽에서 시작해 높은 북(北)쪽으로 점차(漸次) 뻗어나가며 축조(築造)된 것임이 판명(判明)되었다. 여기 고분(古墳)들은 그 구조상(構造上) 다음처럼 분류(分類)된다.
Ⅰ. 주곽(主槨)·부곽(副槨)이 있는 것
1. 주·부곽(主·副槨) 모두 토광목곽(土壙木槨)인 것 년대(年代)는 5세기 전반(前半). 크기는 대형(大形)과 소형(小形)이 있음.
2. 주곽(主槨)은 수혈식석곽(竪穴式石槨)이고 부곽(副槨)은 토광목곽(土壙木槨)인 것. 년대(年代)는 5세기 후반(後半).
Ⅱ. 주곽(主槨)뿐인 것
대(大)·소(小) 두 종류(種類)가 있으며 년대는 5세기말엽경(世紀末葉頃)
Ⅲ. 단독소형목곽분(單獨小形木槨墳)
이상 고분중(古墳中) 그 결과(結果)가 보고(報告)된 10·11호분(號墳)은 11호(號)가 주곽(主槨)으로 석곽(石槨)이고 10호(號)는 11호(號)의 부곽(副槨)으로 토광목곽(土壙木槨)이었는데 부곽(副槨)의 토광(土壙)크기는 6×3.5×2m(심(深))이고 주곽(主槨)은 광(壙)의 크기는 7.5×4.5×3.2m, 석실(石室)은 4.3×1.5×1.5m 크기였다. 대형분(大形墳)은 주·부곽(主·副槨)에서 순장인골(殉葬人骨)이 확인(確認)되었는데 11호(號)(부곽(副槨))에서는 그 수(數)가 3인이상(人以上)이었다. 그리고 부장품(副葬品)으로는 철재갑(鐵製甲)·주를 포함(包含)한 무기(武器)·마구(馬具)가 적지 않게 발견(發見)되어 여기 호족(豪族)들의 군사력(軍事力)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고분벽(古墳壁)은 낙동강구(洛東江口)에서의 가야(伽倻) 묘제연구(墓制硏究)의 귀중(貴重)한 자료(資料)일 뿐 아니라 가야제국(伽倻諸國) 지배층(支配層)의 성격을 보여주는 물적자료(物的資料)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막대(莫大)한 역사고고학적가치(歷史考古學的價値)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