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술(李在述)
묘역번호: 1-45
생 애: 1937.07.20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총상
사망 장소: 도청 앞
기 타: 전공
유 족: 윤금순(처)
1980년 5월 21일 금남로는 10만이 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가득 메워졌다. 대열의 후미에는 아세아자동차에서 습득해온 대형버스와 장갑차를 위시해서 시외 각지에 나가있던 차량들도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협상을 위해 기다리는 도지사는 나올 줄을 모르고 시위대와 전방의 군경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돌고, 긴장감은 일시에 전장의 살벌함으로 변했다. 최루탄이 터지고 돌멩이가 날아가는 중에 뒤에 서있던 버스와 장갑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차량행렬이 도청 앞으로 진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청년들이 흔들어대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시민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5월 하늘에 울려 퍼지는데, 질주해가던 버스가 멈추어 섰다. 단발음의 총성에 버스 운전자가 즉사하고, 뒤이어 장갑차 한 대가 저지선을 향해 질주해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울리는 총성, 차량의 끊일 줄 모르는 진격, 콩 볶는 듯한 총소리. 시민들은 놀라 허둥지둥 어쩔 줄 모르고 심장은 옥죄어들었다...
맞은편에서 차량행렬에 넋을 잃고 있던 이재술 씨가 쓰러졌다. 함께 간 처남이 피를 흘리는 그의 모습을 보았으나, 그를 부르고 쫓아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어깨에 총을 맞았으니 병원으로 옮겨질 테고, 그럼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선 자신은 피했다. 하지만 이재술 씨는 어깨에 총을 맞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을 정통으로 뚫고 지나가버렸다. 전남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그는 소생하지 못했다...
며칠을 전남대병원 영안실에서 그대로 방치되었던 시신은 도청광장으로 옮겨지고 상무관으로 옮겨졌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묻히지도 못하고 상무관에 있었다. 시신을 비닐로 싸고 꽁꽁 묶었는데도 썩어서 부풀어 오른 시신을 견디지 못하고 비닐이 터졌다. 관 뚜껑도 시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뜯어졌다. 이재술 씨의 팔이 찢긴 비닐 사이에 툭 튀어나왔다...
남편은 5월 29일 합동장례식 날 다른 시신들과 함께 쓰레기차에 실려 망월동에 안장되었다. 정말로 남편을 보내고 혼자 남았다. 시댁의 남편 형제들과는 처음부터 소원했었기에 그들에게 의지할 마음도 의지할 틈도 없었다. 완전히 혼자였고, 남은 세 아들이 전부였다. 떠나는 사람이 돌아봐 주지 않으니 남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의지해서 살아야 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