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으로의 시간여행
전설적인 미국시트콤 프렌즈에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챈들러는 우연히 옛 여자친구 제니스를 만났다.
제니스는 챈들러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다시 키우기 시작했으나,
챈들러는 그러지 못했다.
결국 챈들러는 제니스를 떼어 놓기로 결심했는데,
생각해낸 방법이 먼곳으로 발령이 났다고 둘러대는 것이었다.
제니스는 도대체 어디로 발령이 났길래 만나기 힘든 거냐고 캐물었고
챈들러는 순간 '예멘'이라 대답했다.
제니스가 절대 찾아올 수 없는 곳,
아예 찾아올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곳을 예멘이라 생각한 것이다.
챈들러는 제니스에게 그걸 증명하기 위해 나중에 환불할 생각이었던 예멘행 비행기표까지 보여주지만
제니스가 공항까지 마중나오는 바람에 울며겨자먹기로 비행기에 올라타고 만다.
사실 예멘도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이란 이후에는 대개의 유라시아횡단 여행자가 그렇듯 터키로 향하는 것이었고,
예멘이란 동네는 지구본을 돌려보지 않는 이상 어디에 붙어 있는 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중국 쿤밍에서 스페인 아저씨 한분을 만났다.
그 아저씨는 5년 반 전에 스페인을 출발해 한번도 쉬지 않고 전세계를 여행하던 분이었는데
어느 나라가 가장 좋았냐는 나의 상투적인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예멘'이라 대답했다.
참고로 두번째는 수단, 세번째는 파키스탄이었다.
그날 이후로 예멘이란 나라는 내가 반드시 들러봐야 할 곳이 되어버렸다.
5년 이상 세계를 돌아다닌 여행고수님이 첫째로 꼽은 곳이라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멘에 온 지 2주가 지난 지금 그 스페인 아저씨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수백년, 수천년 전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나라 전체가 공개 박물관과 같은 것이며,
주위를 둘러싼 중동의 기름부자 나라들에 비해 무척이나 싼 물가,
시원시원하고 밝은 성격의 사람들,
하필 라마단 기간에 걸려 해가 지기 전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것만 빼면 모든 게 훌륭하다.
게다가 미국을 상대로 맞짱을 뜨고 있는 북한형님들 덕에 남한출신인 나도 덩달아 영웅 취급을 받고 있으니...
이 사진은 예멘에서도 아름답고 신기하기로 유명한 알 하자라 마을인데
스티브맥커리가 예멘에서 찍은 한장의 사진을 단서로 힘들게 찾아간 곳이다.
이 마을을 돌아다닐 때면 마치 미래인인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수백년 전으로 돌아가 과거인들의 일상을 엿보는 느낌이 들었는데,
다행히 과거인들은 미래인을 반기는 눈치였다.
@ Al-Hajjarah, Ye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