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을 위하여
카메라를 처음 가져본 것은 1985년 대학 1학년 때다. 하사로 근무하던 오빠가 그때 돈으로 50만원이 넘는 돈을 주고 샀다고 했다. 그것은 엄마를 위한 것이라 했는데, 정작 그 것으로 몇 통이나 찍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때만해도 카메라는 개인 소장품 가운데 사치품목에 해당되었고, 동아리에도 사진연구회는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오빠의 카메라는 삼성의 로고가 찍힌 미놀타 X-300이었는데, 제법 묵직하고 50mm표준렌즈가 달려있으며 가죽 옷까지 있었다. 매고 다니면 제법 모양 난다는 말을 들었다. 어찌되었든 집에서 그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 사람은 나뿐이었다. 다행히 경쟁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게다가 오빠는 그때 금성이라 불리는 곳에서 나온 자동카메라를 또 갖다 주었으니 그것은 편리성을 따져 동생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건전지를 넣어둔 채로 보관해서 겉만 멀쩡한 못 쓰는 카메라가 되었다.
1989년 2월.
X-300은 진가를 발휘했다. 바로 내 졸업식. 겨울이었고 노출을 맞춰 누군가에게 부탁을 했다. 사각모를 쓰고 어우러져 사진을 찍을 때만해도 행복했다. 하지만 필름을 찾아오던 날, 한 장도 손에 쥘 수 없었던 먹통 필름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고개를 이리 해라, 좀 움직여봐라 등등 주문도 많았던 겨울날. 몇 줌 안 되는 햇살을 맞으며 어렵사리 찍은 사진은 우리들 마음속에만 존재할 뿐. 엄마는 뭔 그런 어려운 사진기를 줘서 이렇게 사진 한 장 못 만들게 했냐며 괜한 오빠만 탓하셨다.
그 후로 카메라는 엄마가 보관하셨다. 내내 사진 찍을 일이 있다 해도 한 번 먹통을 만나고부터 배울 생각은 안 하고 대신 사진관을 이용하거나 올림푸스 같은 똑딱이 카메라를 빌렸다.
어쨌든 그 카메라는 본격적으로 내 나이 서른다섯부터 빛을 발했다. 독거노인 봉사모임이 있었는데, 언제나처럼 기사를 쓰기위해 준비했던 초창기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갔다. 반면에 그 곳이 재개발 지역이던 때문에 그 골목엔 보기 좋고 값이 비싼 좋은 카메라가 많이 드나들었다. 손 안에 들어오는 디지털 카메라로 찰칵거리는 동안 그들은 꽤나 오랫동안 주시하고 있다 한 장을 눌러대며 어슬렁어슬렁 먹이를 찾듯 골목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차에 그들 가운데 연세가 드신 한 분이 똑딱이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 찍는 내게 필름 카메라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통 크게 들이대며 찍을 수 있는 것을 보니 사진해도 되겠다 하시면서 당장 다음 주 모임부터 나오라는 것이다. 그때 생각할 참도 없이 넙죽 대답을 해버렸다.
그 후부터 그 분들의 모임에 가입해서 현상과 인화까지 해보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비좁지만 화장실에서 즐거운 현상을 한다. 인화는 딱 한 번 해보았을 뿐 본격적인 작업은 계획만 갖고 있다. 물론 내겐 DSLR도 있다. 하지만 계속 나를 이끄는 것은 필름카메라 X-300이다. 동안 두 번의 고장 끝에 수리도 받았다. 수리점에서 부품값 줄테니 넘기라고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아직 쓸 수 있고, 오빠의 땀과 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카메라라 셔터가 눌러지지 않아도 보관할 생각이다.
지금 디지털카메라는 여섯 살 소영이가 쓰고 있다. 할아버지 동네에서 잡아온 메뚜기가 담긴 플라스틱 병을 보는 예리한 눈이 예사롭지 않다. 녀석은 자기 그림도 찍고 간혹 가족사진도 잘 찍어주는데 제법이다. 눈썰미가 벌써 사진가다. 먼훗날 처음 카메라와 만난 여섯 살을 기억하며 멋진 예술가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