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흔하디 흔한게 철입니다만, 불과 100여년전만 하더라도 아무나 가질 수 없었던 게 바로 철이었습니다. 그 당시 기술로는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대량생산도 힘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껏해야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나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17세기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이 철이 조금 색다른 곳에 쓰여져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돌을 깎아 세우는 비석을 철로 만든 것입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왜 철비를 만들었을까요?
잊혀진 문화유산 ‘철비(鐵碑)’
낙동강과 밀양강, 남해 바다 등 세 갈래의 물이 만나는 곳. 삼랑진. 물길이 가장 유용한 교통로였던 그 옛날, 영남지방 사람들은 이 곳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거나 물건을 실어 날랐다. 이 삼랑진 나루터로 향하는 길목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색다른 문화재들이 방치돼 있다. 왕궁으로 보내질 조곡이나 공물을 보관하고 관리했던 역대 관원들의 업적을 기리는 선정비들이다. 우리 선조들은 선정을 베풀고 청렴결백했던 관료들이 죽거나 타 지방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 마을 어귀에 비를 세우고 그 공덕을 기렸다. 이 곳의 비들도 같은 맥락에서 세워진 것들이다. 모두 8좌가 설치돼 있는데, 이 가운데 당시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던 조인영과 조운표의 영세불망비는 옆의 그것들과는 사뭇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철을 녹여 만든 철비들인 것이다. 흔히 비석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돌을 깎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1843년 세워진 조인영과 조운표의 비는 특이하게도 그 재료가 철, 바로 주물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그 당시 사람들은 왜 철로 비를 만들었을까? 조선시대에서 철은 귀한 존재였다. 어디서나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돌과는 달리 철은 귀금속처럼 소중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관련된 문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순 없지만 보다 특별한 대접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됐을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추측이다.
과거 삼남대로, 관동대로와 함께 3대 관로로 통했던 영남대로에 공덕비를 세운 것도 같은 이유로 해석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조금은 색다른 비를 세움으로써 주인공의 업적을 보다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싶었다는 것이다.
철비는 경남 마산의 경남대학교에도 보존돼 있다. 밀양 삼랑진 철비와 거의 같은 시기인 1848년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는 창원에 있었으나 1975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시기, 창원이 개발되면서 자리를 잃게 된 문화재들을 이 곳으로 이전하게 됐는데 이때 함께 옮겨 온 것이다. 창원대호부사를 지냈던 인물을 기리는 공덕비로 확인되고 있는 이 비는 삼랑진의 철비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조창(漕倉) - 고려, 조선 시대에 조세미(租稅米)를 모아 보관하고 이를 중앙에 수송하기 위해 수로(水路)연변에 설치한 창고.
두 군데 모두가 조세용 쌀을 보관하던 조창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경상도에는 임금에 바치는 조공들을 보관하고 조세를 징수하는 조창이 세군데에 설치돼 있었다. 창원의 좌조창, 진주의 우조창, 그리고 삼랑진의 후조창이 그것이다. 이를 유추해 보면 철비는 조세를 징수하던 관리 가운데 민심에 어긋나지 않았던 인물에게 고마움을 대신했던 일종의 기념품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유사한 배경을 갖고 있는 철비지만 반면에 그 모양은 여러가지 형태로 발견된다...
포스코역사관 조사에 따르면 철비는 남한지역에서만 300여기가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현존하는 철비는 30여기에 불과하다. 일제시대때 일본이 2차세계대전에 사용하기 위해 군수물자로 빼돌렸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인해 파손된 것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철비의 제작과정이나 건립배경 등 관련문헌도 발견할 수 없다. 우리 선조의 생활상이나 습관을 대변해주는 문화재가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포스코 역사관은 철기문화 보존차원에서 철비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전통 철문화재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사업도 추진 중에 있다.
철비는 17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만들어졌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철비가 왜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상투를 틀고 갓을 쓰고 다니던 우리의 선조들이 철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철비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철비는 당시의 철 제작에 대한 기술수준을 가늠할 수 있고, 그 시대의 생활습성까지도 읽을 수 있는 값진 기록입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져 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재평가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사진. 경남 밀양 삼랑진 철비(鐵碑)
http://www.ebn.co.kr/news/n_view.html?id=259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