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식(尹在植)
묘역번호: 1-40
생 애: 1950.01.06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도청 앞
기 타: 상업
유 족: 배용희(처)
어머니는 아들들이 망월묘역에도 자주 가주기를 바랐지만 아들들은 그에 응해주지 않았다. 사망자 유족회에도 같이 데려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지만 그 역시 자식들은 원하지 않았다. 그냥 잊고만 싶어 하는 듯 보였다. 어머니의 마음은 아프고 남편이 가엾기도 했지만 자식들에게 내색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그날, 다 큰 아들의 울먹이는 전화를 받은 날, 아들이 아버지를 받아들여주던 그날, 어머니는 서럽고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다...
전남대학교 근처에 살던 윤재식 씨는 아침 출근길에 전남대학교를 에워싸고 있는 일단의 군인들을 목격했다. 시국이 어수선하여 매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날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그날 업무상 다방에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다방에까지 최루탄을 쏘며 들이닥쳐서는 모두 나가라고 소리를 쳤다.
“무슨 일이요? 뭔 일인디 최루탄을 뿌림서 이 야단이요?”
“뭐야, 이 새끼!”
앉아있는 그에게 군화발이 날아왔다. 허벅지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돌아온 그에게 전후사정을 들은 아내는 남편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윤재식 씨도 겁이 났다. 18일 이후로는 바깥에는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족들과 집에만 있었다. 그런데 21일 오전, 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찾아왔다...
“야, 이년아. 윤서방 저 안에 자빠져 있다. 인자 어쩔래?”
버럭 고함을 치시는 친정아버지의 말씀에 더는 서 있을 힘을 잃고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혼자 남겨질 딸 생각에 마음이 아픈 아버지는 더 역정을 내셨다.
“들어가. 들어가서 네 눈으로 보란 말이다.”
아버지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들어간 그녀는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아버지가 잘못 보았기를, 제발 남편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너부러진 시체들 사이에 남편의 발이 보였고, 그의 옷이 보였다. 눈은 남편의 얼굴에 머물고야 말았다.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지독한 감시를 견디지 못하고 배용희 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했다. 무작정 올라간 서울의 생활이 만만할 리 없었다. 월 2만 원도 안 되는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자니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다치거나 아프면 배용희 씨는 그만 죽고만 싶어졌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리라 다짐을 해도 절로 흐르는 눈물을 어쩌지 못했다...
그녀는 힘들게 살아왔다. 그러나 누구의 동정도 원하지 않는다. 5.18 민중항쟁을, 남편의 죽음을 이용한 어떤 것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5.18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피해자입네 하면서 5월을 헐값으로 팔아넘기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5.18의 참된 의미와 진실을 입막음하고 함부로 비판하려는 사람이 있음이 또한 어이없고 가슴이 아프다. 남편을 함부로 앗아가고 또 함부로 이용하려 하는 세상이 미운 것이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