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호(尹成浩)
묘역번호: 1-39
생 애: 1953.01.21 ~ 1980.05.27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칼빈 총상
사망 장소: 무등극장 앞
기 타: 광주전화사 전공
유 족 : 박경행(모)
그는 언제나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다. 거리에서 들리는 아우성이 끊이지 않고, 계엄군의 얼룩무늬 군복이 활개를 치던 1980년 5월 그때에도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장에 나갔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아들의 뒷모습이 언제나 든든했던 어머니도 그때만은 나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의 만류에도 아침을 먹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래도 출근은 해서 자리라도 지켜야지요.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일이니 저한테 무슨 일이야 있겠어요.”
점점 사태가 심각해지고 전날 밤에는 밤새도록 방송국이 불타고 총소리도 들렸다. 마음이 불안해진 어머니는 5월 21일 아침, 아들더러 출근하지 말라고 말렸다. 하지만 그는 출근했다. 자신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어머니께 자주 전화를 드렸다...
아침에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나섰지만 내심 불안했던 것은 윤성호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을 피해 골목을 돌아 겨우 출근했는데 밖에서 느닷없는 총소리가 들렸고, 사무실의 직원들은 모두 움츠려들었다. 윤성호는 밖을 내다보며 혀를 끌끌 차는 상사 조남신 씨의 곁으로 다가갔다.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여 마음이 산란해지는데 ‘탕’ 단발의 총소리가 들리고 곁에 서 있던 조남신 씨가 ‘억’ 소리를 지르는가 싶더니 자신도 금세 쓰러지고 말았다. 도청 수협 옥상 쪽에서 날아든 한 방의 총탄은 조남신 씨의 턱을 관통해서 윤성호의 머리에 가 박힌 것이다. 조남신 씨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리고 윤성호는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어머니가 전화를 건 것은 그 후였다...
기도 덕분이었을까. 여전히 의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산소홉기를 뽑아도 좋을 정도로 호전되어서 일반 병동으로 옮겼다. 아들이 살아나는 줄 알았다. 어머니는 한숨을 돌리고 잠깐 밖에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 그리고 돌아와 보니 아들의 침대가 텅 비어 있었다.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진 윤성호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하룻밤을 새고 다음날인 5월 27일 새벽, 도청에 끝까지 남아 광주를 사수하겠다던 아름다운 꽃들이 고개를 떨구던 그 시각에 윤성호는 숨을 거두었다. 어렵고 외로웠던 스물일곱의 생애가 힘없이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