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지 않는 얘기같지만 그당시 영도 앞바다는 황금어장이었다. 남항동 앞바다는 대구와 청어 어장이었고, 청학동 앞바다는 멸치 어장으로 유명하였으며 태종대 앞바다에는 갈치와 영도 오징어라고 부르는 오징어가 많이 잡혔다. 개항이후 1903년부터는 이 어장을 노린 일본 어부들도 최대 근거지가 되고 이때 영도를 떠났던 사람들도 외지에서 돌아온 어부들도 정착을 하게 된다. 이러한 요인은 영도를 일본인들의 어업전진기지와 조선업기지로 면모를 일신시키게 된다. 영도에 거주민들이 늘어나게 되면서 영선동을 이루고 1890년에는 용미산 기슭(지금의 롯데월드 신축장자리)에서 봉래동 뱃머리(부산대교 영도기점 근처)까지를 오가는 나룻배(거룻배) 2척을 운영하기에 이른다. 이 나룻배는 4척으로 늘어나고 1908년(순종 2)에는 나룻배의 수입을 허치오, 김옥성 등이 발기한 사립옥성학교의 유지비에 사용하기로 영도사람들은 합의하면서 나룻배도 5척으로 늘어난다. 당시 초량장날과 부산진장날, 동래장날에는 뱃손님으로 붐벼 사공들은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고 한다. 한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영도 나룻배 총수입이 한달에 460원에 이르렀다는데, 배삯으로 어른이 1전(어린이는 무료)이었으니 한달 이용객이 4만6천여명에 이른다는 엄청난 기록이다. 영도사람들이 부리는 영도나룻배가 성업하는 것을 눈여겨 보던 일본인은 또다른 뱃길을 튼다. 이것이 1901년 오오다 스지마스를 비롯한 일본인이 경영한 남포동 자갈치시장에서 대평동에 이르는 뱃길이다. 이로인해 이 뱃길은 자연스레 일본인 전용길이 되고 앞서 개설한 봉래동 뱃길은 조선인의 전용뱃길이 되었다. 1914년이 되면 대평동 일본인 뱃길의 나룻배가 디젤엔진 동력선으로 개조되고 이어서 우리 나룻배도 똑같은 디젤엔진 동력선으로 바뀌면서 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통통배' 어원의 시초가 된다. 1920년 사립옥성학교가 폐쇄되고 묵도공립보통학교로 바뀌면서 옥성학교 유지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던 봉래동 뱃머리-용미산 기슭사이의 나룻배 운영권은 행정기관인 부산부의 직영사업으로 넘어간다. 부산부는 그때 돈 11만원을 들여 새동력선 2척을 더 마련한다. 그러나 봉래동 뱃머리에서 운행되던 이 나룻선은 1934년 영도다리의 개통으로 그 기능을 잃게되어 폐쇄되어버리고 대평동과 자갈치 시장을 잇는 나룻배만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영도 대평동 도선장에서 본 영도대교
裸 袒
2006-09-24 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