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근(梁彰根)
묘역번호: 1-38
생 애: 1964.12.10 ~ 1980.05.22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 총상
사망 장소 : 공용터미널
기 타 : 상업
유 족 : 양중근(형)
이제 갓 고등학교에 들어간 창근이는 형들이 외쳐대는 민주화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전두환이 무엇을 어쨌기에 몰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지 다 알지 못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전두환이 보냈다는 군인들이 친구들과 형들을 무자비하게 밟아대고 몽둥이를 멋대로 휘둘러서 초죽음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창근이에게는 눈앞에 보이는 그것이 진실이었다.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군부독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창근이 망월동에 묻히고 한참이 지나서야 어머니는 창근을 찾을 수 있었다. 시커멓게 썩어가는 창근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저 시신의 소지품과 집에서 입고 나갔던 교련복으로 아들을 알아볼 뿐이었다. 밤이 깊어져도 돌아오지 않고, 며칠이 지나도 집을 잊은 사람처럼 돌아올 줄을 모르는 자식을 찾아 헤맬 때는 그래도 견딜 만했다. 아직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었다. 눈앞에 창근의 시신이 땅에 묻혀 썩어가고 있었으니 오열하는 그대로 돌이 되고 싶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대하자 중근 씨는 떠나간 동생의 빈자리보다 부모님의 미어지는 가슴이 먼저 다가왔다. 장남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어머니는 또 한바탕 비명 같은 울음을 토해내고, 그 어머니를 달랠 재간이 없는 아들은 또 그렇게 주저앉아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모자의 뜨거운 눈물에 아버지도 한 구석에서 눈물을 훔쳤다. 세 가족에게는 그렇게 우는 것밖에는 자신들을 달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유족회 활동을 시작하셨다. 창근의 죽음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제 갓 중학교를 졸업한 어린 자식을 앗아간 짐승 같은 놈들을 그대로 둘 수 없어 나섰다. 신군부의 수뇌였던 전직 두 대통령이 광주에 방문할 때마다 그들을 저지하려다 경찰차에 실려 낯선 장소에 버려졌고, 경찰서에 잡혀가 수모를 당하면서도 어머니는 그만 둘 수 없었다...
창근의 모든 것을 가슴에 담고 계실 어머니는 지금 세상에 없고, 아버지는 팔순을 훨씬 넘긴 노인이 되셨다. 창근이 없는 25년의 세월을 이야기해줄 사람이 이제는 없다. 하나 둘씩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과 작별하고만 있는데 25년 전의 애끓는 서러운 사건은 아직도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다. 보상이 이루어지고 망월묘역이 성역화가 되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