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태(安秉泰) 묘역번호: 1-36 생 애: 1956.11.24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도청앞 총상후 광주기독병원 기 타: 목공 유 족: 안병권(형) 안병태의 방에서 두런두런, 그러나 분노가 실린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안병태는 목공소에 다니고 있었지만, 계엄군의 만행이 그 도를 넘어서면서 더 직장에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친구 권학봉이 왔다. 안병태와 권학봉은 울분을 토하며 광주에서 행해지는 계엄군의 만행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펄펄 피 끓는 청춘들은 그대로 보아 넘길 수는 없는 일이라는 서로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살인마를 몰아내기 위해 나가봐야 한다”고 안병태와 권학봉은 집을 나섰다. 두암동 집에서 금남로까지 걸었다. 광주은행 사거리에 도착했을 때 멀리서 물결치는 수십만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행렬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두 사람은 사람들로 가득 찬 도청 앞 분수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계엄군의 발포명령이 떨어졌다. 안병태는 더 걸음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이마로 총알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가족들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병태는 청소차에 실려 망월동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그는 4년 뒤에 승주에 있는 망월동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그는 4년 뒤에 승주에 있는 공동묘지로 옮겨가야 했다. 망월동의 묘지를 이장하지 않으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형사들의 협박에 아버지는 아들의 이장을 허락하고 말았다. 한 번 묻은 자식을 다시 파내야 하는 것은 아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인 것만 같아서 단호히 거절해야 했지만 남은 자식들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는 것이 어버이의 마음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유골은 깨끗했다. 그런데, 이마에 총을 맞았던 병태의 두개골에는 선명한 구멍이 있었다. 너무도 선명하게 뚫린 구멍을 본 형은 다시 한 번 떠난 동생의 빈자리를 실감했다. 병태가 떠나고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5남매의 가난한 가장으로 의연하기만 하시던 아버지였지만 작은 아들의 죽음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하지는 못하셨다. 병석에 누워 계신 아버지. 그 곁에서 죽음보다 고통스런 날을 보내시는 어머니의 눈물. 그것은 분명히 병태가 남기고 간 흔적이고 상처였다.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할 병태의 빈자리는 부모의 가슴에 차디찬 바람을 몰고 왔다. 1997년 안병태는 다시 신묘역에 안장되었다. 유골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데 사고 당시 박혔던 탄두가 툭 떨어졌다. 부식되어 있던 탄두는 그간의 세월을 그대로 보여줬다. 두 번이나 영혼의 잠자리를 옮겨 다녀야 했던 병태의 넋은 참으로 고달프기만 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현린[玄潾]
2006-09-16 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