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이
첫사랑.
가슴이 벅차서 빠개질까봐, 소리 높여 좋아하는 너의 이름 제대로 한 번 불러보지 못했어. 널다란 운동장에 사람들 소리 사그라들 때 고요 속에서 외치던 네 이름. 그 이름에 화들짝 놀라 달려간 그 곳. 늘 그 자리, 우리가 앉았던 공대 건물 앞 그 벤취. 사계절 모두 가을이었던 그 벤취에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보다 우리가 바라보던 얼굴보다 수없이 오가던 애틋한 마음.
단발머리 곱게 늘어뜨리고 책 몇 권 가슴에 안고 사뿐사뿐 걸어오던 그 모습. 언제고 곁에 있어줄 사람처럼 희망이던 우리. 시간 흐른다해서 우리 마음도 흘러갈까 했지만 우리 마음에 든 시샘때문에 우린 편지 한 장 남기지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어. 누구 잘 못은 아니었지. 풋내 나는 사랑, 처음 하는 사랑, 나 보다 너를 사랑한 사랑, 사랑에 사람이 빠져버린 사랑, 그 때문이었어.
희끄무레한 기억 속에 한 곳에 앉아있는 지금, 어렴풋이 생각난다. 그 때 그 첫마음으로 잡은 손. 온 몸이 떨리고 손끝에서 퍼지던 축축함에 흥건한 네 손아귀. 그것에 꽉 감긴 내 손. 그 손의 떨림. 그 시간이 지금 가슴으로 전해오고 목을 간지럽히는 갈바람에 흐드러지게 웃어버리는 네 웃음 소리. 그 웃음 소리에 시간이 흘러도 모를 것만 같다.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