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수(羅洪洙) 묘역번호: 1-25 생 애: 1947.03.15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칼빈 총상 사망 장소: 도청앞 총상후 전남대 병원 기 타: 목공 유 족: 나상민(자) 한 가정이 깨졌다. 빗발치듯 날아다니는 월남전의 총탄도 피해 돌아온 나홍수 씨는, 그러나 1980년 5월 도청에서의 총알은 피하지 못했다. 아니 피할 수 없었다. 그의 가슴에 조준하고 쏜, 최정예 사격수에게서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도청을 위시한 고층 건물의 옥상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격수들은 짧고 정확히 아래의 사람들의 목숨을 가져갔다. 도청 앞에 서 있던 그는 갑자기 쏟아지는 총알을 피해 몸을 움츠렸다. 다음 순간, 전일빌딩 옥상에서 또 한 발의 총탄이 그의 오른쪽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사람들이 쓰러진 그를 끌어안고 급히 전남대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는 겨우 큰댁의 연락처만 남기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제 남은 아이들은 어떻게 키울 것인가? 이금자 씨는 오로지 남편만 바라보고, 아이들만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녀 곁에 이제 남편이란 존재는 없다. 삶의 의욕마저 사라졌다. 아이들을 위해서 더욱 힘을 내고 싶었지만 마음에서 오는 병을 어쩌지 못했다. 우울증에 시달리며 오랫동안 병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다 간경화가 왔고, 1987년 남편의 뒤를 좇았다... 언니의 아픔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기에 그녀는 선뜻 아이들을 맡겠노라고 약속을 했고, 경숙 씨는 약속을 지켰다. 젊은 여자,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들의 엄마, 아빠 노릇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위 어른들도 말렸다... 이모도 조카들도 가슴 깊은 곳에 아픔을 묻어두고 견뎌냈고, 지금에 이르렀다. 일곱 살짜리 코흘리개 큰조카가 어느새 서른이 넘은 어른이 되었다. 둘째인 딸은 결혼을 했고, 막내는 대학을 졸업했다. 아픈 가슴으로도 비뚤지 않고 무탈하게 자라준 아이들이, 경숙 씨는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이만큼 오도록 곁에서 어머니가 되어주고, 아버지가 되어준 이모가, 조카들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현린[玄潾]
2006-08-16 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