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정(金 禎)
묘역번호: 1-21
생 애: 1959.10.04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 도청 앞
기 타: 선반공
유 족: 김정용(형)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수개월 전부터 지옥보다 더한 혹독한 진압훈련을 받았다. 진압훈련의 목적은 불순분자의 사주를 받아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충정훈련이 그것이었다. 광주에 투입되어 시내에서 작전을 시작하면서 충정훈련 과정의 고통을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공수부대원들은 날뛰고 다녔다. 그들은 더 이상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는 국민의 군대가 아니었다. 오직 정치권력의 찬탈을 위해 혈안이 된 정치군인들의 주구에 불과했다. 그들이 휩쓸고 간 곳은 어디든 시민들의 피로 물들었고, 살려 달라는 절규가 새어나왔다...
광주 충장로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김정은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어지면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프레스 공장에 취직을 해 노동자로서 평범한 생활을 시작했다. 1980년 5월 18일. 이날은 일요일이어서 김정은 친구와 함께 양동에 있는 당구장으로 놀러갔다. 친구와 함께 당구를 치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공수부대원들이 당구장에 있는 젊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함께 간 친구는 앞니가 6개나 부러져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김정 역시 심하게 두들겨 맞았으나 다행히 큰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다리를 조금 절룩거릴 정도여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는 집에서 제대로 운신조차 못 하고 자가 치료를 했다...
김정은 공수부대에게 당한 분노로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당시 광주의 시위 상황은 처음 대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되었으나 김정처럼 공수부대원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당하거나 자기 가족들이 당한 것을 지켜 본 시민들의 분노가 시위의 참여로 이어져, 마침내 모든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상황으로 발전해 갔다...
집을 나간 지 며칠이 지나도 아들이 집에 들어오지 않자, 어머니 김봉연 씨는 시내를 다 뒤지며 아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5월 20일 공원다리 위에서 시위대 차량에 타고 있는 아들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 어디에서도 아들을 찾을 수 없었다. 노심초사하던 어머니는 20사단에 하사관으로 복무하다가 광주의 계엄군으로 파견나와 있던 김정의 형에게 동생이 혹시 어디 잡혀 있거나 다쳐서 입원해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 형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찾아보았으나 광주의 상황이 종료된 이후까지도 김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6월초쯤에 망월동 공동묘지에 시체들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형 김정용 씨가 어머니를 모시고 내키지 않은 걸음이지만 마지막이다 싶어 망월동으로 찾아가 보았다... 14번째 관을 열었을 때 형은 직감적으로 참혹하게 부패해 있는 시신이 동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은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패해 있었다. 형은 동생이 공장에서 일하다가 프레스에 손가락이 절단된 사실을 떠올렸다. 손가락을 확인을 해보니 바로 자신의 동생 김정이 틀림없었다. 형은 더 이상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비닐에 싸여 있는 동생의 시신을 그대로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