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화(金在華)
묘역번호: 1-20
생 애: 1954.10.20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칼빈 총상
사망 장소: 광주역
기 타: 회사원
유 족: 양지순(모)
1980년 5월 21일, 새벽 4시가 다 된 시각에 어둠을 가르는 전화벨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동반했다. 며칠째 들어오지 않는 재화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보내다 겨우 잠을 청한 것이다. 전화벨 소리는 가족들의 새벽잠을 단번에 빼앗았다. 떨리는 손으로 집어든 수화기 저편에서 아들 친구라는 이의 음성이 들린다.
“재화 아버님이시죠? 저, 재화 친굽니다. 재화가, 재화가 광주역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았습니다. 친구들이 급하게 리어카에 실어 서방에 있는 노광철의원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20일 밤부터 도청과 시청을 제외한 광주의 모든 지역에서 계엄군들은 시위대에 밀려 혼비백산 물러났다. 밤이 깊을수록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KBS가 불타고 문화방송국이 불타는 것을 지켜보던 시민들의 가슴은 후련했다. 시민들은 광주역에 공수부대원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광주역으로 몰려갔다...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공수부대는 우리의 형제를 참혹하게 죽이고 있습니다. 전두환은 쿠데타를 일으켜 김대중 선생을 체포하고 광주시민을 모두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맨주먹이지만 전 시민이 힘을 합해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도청으로 모입시다. 광주에서 공수부대를 몰아냅시다.”
가슴을 파고드는 날카롭고 힘 있는 여인의 음성이 하늘에 울려퍼지고,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저지선에 의욕을 잃어가던 시위대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2천여 명의 시위대는 다시 대열을 정비하고 공수를 향해 달려나갔다. 그리고 공수는 밀리기 시작했다. 한순간,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던 공수의 진영에서 귀청을 찢는 총성이 터져 나왔다. 공포탄이었다. 시민들은 흩어졌던 대열을 다시 형성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다시 총성이 울리고 시위대 맨 앞에 섰던 청년 몇 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맏형인 김재원 씨는 동생을 잃은 슬픔에 더해진 또 다른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동생이 가던 그해 5월에 그는 동곡파출소에서 근무하던 경찰관이었다. 그는 광주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열흘 전부터 경찰중대에 편성되어 시위 진압에 나섰다. 동생의 사망소식을 듣고 아버지와 함께 병원에 찾아가 시급하게 동생의 시신을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해산 명령이 내려지고, 그는 아무 민가에나 들어가 사정을 했다. 경찰복으로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사복을 얻어 입고 간신히 시내를 빠져나왔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