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self)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난다.
우리 선생님은 물상선생님이었거든. 그 선생님은 발음이 일본식 발음이어서 영어도 잘라먹은 발음이었는데 우리말은 더더욱 짧았어. 연세도 많지 않으셨던 분이 꾸부정하셨지. 수업시간엔 늘 입가에 하얀 거품이 묻어났고 작은 학교인데도 과학실이 있어서 우린 교실에서 또다른 공간으로 옮겨가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어. 더군다나 여자들만 다니는 여중이었으니까 천방지축 다녀도 누가 뭐라하지 않았거든.
그 시절 우리는 실험실에서 많은 것들을 보았어. 여름엔 몇 명이 뽑혀서 개구리 실험을 했고, 그 실험을 통해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에 나오는 해부되고서도 팔짝팔짝 뛰어나가는 장면이 진짜지만 따끈따끈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은 거짓말인 것을 알게 됐지. 그때 배 갈라진 채로 바깥으로 튀어나가던 개구리의 모스은 수술대 위에서 사지가 벌려진 채로 있었던 것보다도 더 처참했어. 우린 그때 '소녀'였거든.
그 날 이후 실험실로 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는데, 나중에 우리 선생님 하얀 가운데 뚫린 구멍들과 손가락이 몇 개 없던 것을 보면서 화학약품으로 인한 것임을 알았던 때에 이미 슈바이처나 나이팅게일이 되는 것엔 내 적성이 아니라고 아니 우리들의 적성이 아니라고 다섯명은 입을 모았어. 그 무렵엔 다들 몰려다니잖아.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금영이란 친구는 다섯 가운데 유난히 푸짐한 체구였고 언니처럼 포근하게 잘 대해줬지. 다섯 중 둘은 기억나지 않지만 또한 친구는 공부를 무척이나 잘했어. 얼굴이 까맿고 목소리나 걸음걸이가 남자 같았지. 여자도 변성기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렇게 남자 목소리가 될 줄은 몰랐던거지. 그때부터 우린 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남자들처럼 잡지를 보거나 그러진 않았어.
아...공상 이야기를 하려다 이렇게 됐네. 공상. 우리땐 꿈꾸는 것이 시도때도 없었지. 밤엔 천정을 보면서 눈을 감으면 우주가 펼쳐지고 그 우주의 한 공간을 유영하는 꿈을 꾸곤 했어. 그리고 어김없이 다음날 볕 좋은 담벼락 아래서 한 사람씩 꿈을 이야기했지. 한 동안 같은 꿈을 꾸다가도 점점 현실적이 되어가곤 했는데,하루는 남자목소리의 그 애가 이상한 책을 들고 나타났지뭐야.
꽤 두껍고 그림이 많았고 우리말 보다 영어가 많았던 것 같아. 그리고 한 장면. 아직도 그 장면은 지워지질 않고 이야기 속에서 살아있지. 내게 처음 심리학을 전공하게끔 만들었던 그 책. 지금 생각해보니 '심리학 개론'쯤 되는 것 같아. 자기 오빠가 대학생이었는데 배운다고 하도 이상해서 들고왔다며 보여줬지. 한 사람이 누워있고 그 옆으로 여러 사람이 보고 있는 장면인데 재미난 것은 그 누워있던 사람이 그림자처럼 서있고 그의 귀와 입, 코에서 하얀 연기가 나오고 있던 그림이었어. 그게 바로 '영혼'이라든가.
그때부터 우리들의 주제는 삶과 죽음. 죽음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한 넓디 넓은 그러나 논리는 없는 공상의 나래를 펼치는 계기가 되었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자아 말이야. 생각해보니 그때 '자아'가 뭔줄이나 알았겠어. 고등학교 들어가서 윤리 시간이나 철학 책에서나 만나든 그 어려운 단어를 말이야. 자아 정체성 혼미기.
아무튼 그런 저런 공상에 노출되어 땅에 발은 디디고 다녔지만 붕붕 생각은 날아다니던 그 때. 기억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