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봉(金完奉) 묘역번호: 1-18 생 애: 1966.07.24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사망 장소: 전남도청 앞 기 타: 학생(무등중 3학년) 유 족: 송영도(모) 구시청 4거리에 살던 송영도 씨가 도로에 나서고 보니 ‘도청으로 집결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고생하는 청년들에게 빵이라도 먹여야겠다’며 모금을 하는 이가 있었다.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고 돌아서는 그녀를 모금통을 들고 있던 사람이 불렀다. “아줌마, 지금 도청에서 사람들이 모여 군인들하고 싸우고 있는디라. 어저께 밤부터 집에도 안 들어가고 있는 사람이 많아라. 아침밥도 못 묵고 고생을 하고 있단 말이요. 근디 나는 계속 모금을 해야겄고, 그 사람들한테 음식을 사다줄 사람이 필요한디, 좀 도와줄라요?” “아이고, 그렇게 합시다. 내가 나서서 데모는 못해도 그런 일도 못하겄소?” 그녀는 절에 가던 걸음을 돌려 10만 원을 받아들고 황금동에 있는 슈퍼들을 뒤졌다. 당시에 10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빵, 우유, 담배, 계란, 치약 등을 여기저기 슈퍼에서 사 모았다. 부피가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근처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에게 부탁했다. 그네들은 선뜻 짐보따리를 챙겨들었다... “아짐, 저 사람들도 아침도 못 묵고 우리랑 계속 이러고 있었단 말이요. 배가 많이 고플 텐디, 경찰들한테도 좀 갖다주시오.” 그녀는 경찰들이나, 공수부대들이 무섭지 않았다. 눈앞에서 바로 대하고 보니 동생 같고, 이웃집 자식들 같았다. 그래서 선뜻 게란 판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가 나누어 주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해가며 허겁지겁 받아먹었다. 그 모습을 보니 짠한 마음이 들어 한숨이 절로 났다... 송영도 씨는 집으로 돌아와 완봉이를 찾았지만 없었다. 그때 금남로는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쓰러져 고통스런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사상자를 구하려 달려나가던 사람도 고꾸라졌다. 금남로는 쓰러진 이들로 핏물로 흥건히 젖어갔고, 절규로 가득했다. 피맺힌 신음소리를 들으면서도 멈출 줄 모르고 쏟아지는 총탄에 거리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죽어 가는 이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금남로의 거리에 완봉이가 있었던 것이다... 눈물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새벽, 옆방에 세 들어 사는 총각을 깨웠다. “어제 우리 완봉이가 나갔는디 안 들어왔단 말이네. 아무래도 죽어분 것 같당게. 혼자서는 도저히 무서워서 못 돌아다니겄는디, 나랑 병원 좀 가보세.” 애써 마음을 달래며 태연한 척 빨리 나오라고 다그쳤지만 그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가슴에서 쿵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온몸의 기운이 모두 빠져 나가버린 듯 한 걸음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네 다리로 벅벅 기어 겨우 문 앞까지 갔다. 들어가지는 못하고 열린 문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보기에도 끔찍한 시체들이 즐비했다. 그 속에 전날 아침에 완봉이가 입었던 줄무늬 셔츠와 청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들의 맨발이 보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침나절에 자신의 손으로 계란을 건네준 그 군인들의 손에 아들이 죽은 것이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주며 짠하게 여기던 동생 같던 그들이 자신의 아들을 앗아가버린 것이었다... 29일, 완봉이가 망월동으로 가기 전까지 어머니는 상무관에서 매일 아들을 지켰다. 매일매일 조금씩 관이 벌어졌다. 냄새가 나고 물이 흘렀다. 그러나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던 어머니는 그저 벌어지는 관에 손을 넣어보며 ‘왜 자꾸 벌어진다냐’하며 안타까워하기만 했다. “아이고, 아줌마, 시체가 썩어서 부어오르요. 물이 흐르고 관뚜껑이 열리는구만 그냥 그대로 놔두요? 어떻게라도 해보시오.” 망월동에 가서 완봉이를 묻으려고 관을 열려는 순간, 펑 소리가 나며 관의 옆구리가 날아갔다. 시신의 눈, 코, 입을 막지 않은 탓이다. 제 손으로 죽음을 처리해보지 않은 나약한 어머니, 그리고 도와줄 사람도 없던 어머니는 그렇게 아들을 보내는 일조차 서툴렀다. 제 자식이지만 썩고 부어오른 완봉의 눈을 어머니는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아깝기만 하던 아들의 몸뚱어리가 끔찍하게 일그러진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독한 마음을 갖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순하고 여리게만 세상을 살아온 마흔 여섯의 아낙은 이를 물었다. 그리고 제 2대 유족회장으로 투쟁의 선두에 섰다. 가진 것도 아는 것도 없었다. 우선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시청에 있는 유족들의 주소를 입수하여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유족들을 하나로 모았다. 그리고 좁은 자신의 집에서 회의를 하며 5월 열사들의 명예와 꿈을 되찾기에 온 노력을 기울였다... 1987년 어느 날인가는 시위에 참석했다가 혼자서 동부경찰서로 연행된 적이 있었다. 봉고차에 실려지자마자 무릎을 꿇렸다. 그리고 뒤에서 목을 짓눌러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더운 여름에 숨이 턱턱 막히는 차안에서 얼굴까지 바닥에 짓눌러져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사람 살려’라는 말이 목구멍을 타고 나와서도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분했다.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어떤 개 같은 놈이야? 나를 죽일라고 작정하고 눌렀지? 아니믄, 사람을 그렇게 다룰 수가 있어? 어떤 새끼야? 나와. 그놈 데려와!” 전쟁을 치르듯 하루하루를 살았다. 망월동이 성역화가 되어 완봉이는 신묘역으로 이장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이 생살을 떼어내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준 아들의 죽음을 위로해 주지는 않았다. 어떤 사과도 어떤 자백도 들을 수 없었던, 누구나 아는 책임자들의 태도와 그들을 옹호하고 감싸는 듯 불분명한 정치세력의 작태가 여전한데 말뿐인 성역화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내키지 않았지만 완봉이를 이장하던 1997년 5월, 그녀는 아들과 다시 만났다. 이제는 형체도 없이 썩어 뼈만 남은 아들의 몸뚱이를 대하니 그동안의 설움과 수모가 다시 밀려와 그녀는 아들 앞에 주저 앉고 말았다... “이놈아, 네가 가고 나서 이 에미가 어떻게 살았는 줄 아냐? 아이고 이놈아! 내 아들아!”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현린[玄潾]
2006-07-25 0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