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염천의 여름날, 늦봄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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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文益煥, 1918.6.1~1994.1.18)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늦봄이다.
1918년 6월 1일 만주(滿洲) 북간도(北間島)에서 태어나 한국신학대학교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유니언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32년 숭실중학교 재학 중 신사참배 거부로 중퇴한 뒤, 1943년 만주 봉천신학교 재학 중에는 학병을 거부하는 한편, 이 해부터 전도사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47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55년부터 1970년까지 서울 한빛교회 목사로 일하면서 한국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강의하였다.
이후 신구교 공동구약번역 책임위원을 거쳐, 1976년 3월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되어 22개월 만에 출옥한 뒤,
1978년 10월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비판해 형집행정지 취소로 다시 수감되었다.
1980년 5월 '내란예비음모죄'로 3번째 투옥되었다가 31개월 만에 출옥한 뒤, 1983년 1월부터 '고난받는 사람을 위한 갈릴리교회' 목사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1985),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1989),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1991),
제4차 범민족대회 대회장(1993) 등을 지냈다.
1993년까지 5·3인천항쟁,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총 6회에 걸쳐 투옥되었고, 1989년 3월에는 통일의 길을 연다는 기치를 내걸고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의 2차례 회담 끝에 통일 3단계방안 원칙에 합의하는 한편, 1993년에는 통일맞이 7,000만 겨레모임 운동을 제창하는 등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전념하다가 1994년 1월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1992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고, 저서에 《통일은 어떻게 가능한가》(1984), 《가슴으로 만난 평양》(1990), 《걸어서라도 갈테야》(1990)
등이 있으며, 시집 《새삼스런 하루》(1974)와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1984) 등이 있다. 그 밖에 산문집과 옥중서한집 등 1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문익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 중에서
1989년 1월 1일. '잠꼬대 아닌 잠꼬대'란 시를 썼던 늦봄은 그로부터 불과 석 달여가 지난 3월 25일 유원호, 정경모씨와 함께
'금단의 땅' 평양으로 갔다. 시에서 밝힌 그대로였다.
평양을 방문한 늦봄이 "분단 50년을 넘기는 것은 민족의 치욕이다. 해방 50주년을 통일의 원년으로 만들자"고 말하자,
김일성 주석이 동의하고 나섰고, 그 뒤 남과 북, 해외에선 1995년을 '민족의 희년', '통일의 원년'으로 만들자는 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방북 중에 문익환 목사는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장과 회담을 하고, 연방제 방식과 자주·평화·민족대단결에 의한 통일 원칙 등 9개 항이 담긴
'4·2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늦봄 문익환의 통일 노력에 당시 남쪽 정권(노태우 정권)의 반응은 혹독함 그 자체였다.
늦봄은 귀국 전부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겠다는 위협을 받았으며, 1989년 4월 13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즉시 구속 수감되었다.
당시 늦봄의 나이 71세였다.
1989년 6월 26일. 방북사건의 첫 공판이 열린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는 검사보다도 더 통렬한 문익환 목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찬양·고무했다. 맨날 욕하고 그러면서 통일이 되겠어? 상대방의 좋은 점을 자꾸 찾아내 찬양 고무해야 하지 않겠어."
이 재판에서 늦봄은 자신의 통일관을 모두진술로 이렇게 표현했다.
"분단 45년, 나는 이 45년이라는 것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한다. 우리가 얼마나 못났으면 남들이 들어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그어놓은 선,
그게 뭔데 지우지 못하고 1백만의 군대를 남쪽과 북쪽에서 무장시켜 그것이 지워질세라 지키고 있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정법을 어기면서 평양에 갔다 왔다. 45년 비극의 수치를 씻어내고 45년 분단의 비극을 청산하고 싶어서 갔다 왔다. 무엇이 잘못인가?"
방북사건으로 투옥됐던 늦봄은 19개월 만인 1990년 10월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뒤에 더욱 왕성하게 통일의 절박함을 온몸으로 선언했다.
"통일은 다 됐어! 통일은 다 됐어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서 사라지고, 더이상 그만큼 '통일'을 부르짖던 이들이 하나둘 저승으로 떠나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이 다 됐어요.'라던 그의 목소리가 새삼 가슴을 저민다.
나는 아직도 강경대 열사 장례식장에서 열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울부짖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빼곡히 학생들로 가득찬 학교 광장에서 그 빛나는 두 눈을 번뜩이며 청년의 갈 길을 말해주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오?
155마일 휴전선을
해뜨는 동해 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굽어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오?
철들고 셈들었다는 것들은 다 죽고
동남동녀들만 남았다가
쌍쌍이 그 앞에서 화촉을 올리고
-그렇지 거기는 박달나무가 서있어야죠 -
그 박달나무 아래서 뜨겁게들 사랑하는 꿈, 그리고는
동해 바다에서 치솟는 용이 품에 와서 안기는 태몽을 얻어 딸을 낳고
아침 햇살을 타고 날아오는
황금빛 수리에 덮치는 꿈을 꾸고
아들을 낳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오?
그 무덤 앞에서 샘이 솟아
서해 바다로 서해 바다로 흐르면서
휴전선 원시림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펼쳐지고
한려수도를 건너 뛰어 제주도까지 뻗는 꿈,
그리고 우리 모두
짐승이 되어 산과 들을 뛰노는 꿈,
새가 되어 신나게 하늘을 나는 꿈,
물고기가 되어 펄떡펄떡 뛰며 강과 바다를 누비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꿈을 비는 마음 - 문익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