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金光錫)
묘역번호: 1-12
생 애: 1954.10.19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해남
사망원인: M-16 총상(좌 흉부 관통)
사망장소: 도청앞 총상후 전남대 병원
기 타: 학생(전남대 법대 3학년)
유 족: 김인태(부)
전남 해남 계곡면에서 태어난 광석은 어려서부터 총명한 탓에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초등학교를 시골에서 졸업하고 중학교부터 광주에서 유학한 광석은 광주북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제일고를 거쳐 전남대학교 법대에 입학했다. 광석은 자신에 대한 기대를 의식해 집안 식구들 모르게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5월 20일 광주문화방송국이 시민들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형은 동생 광석에게 “더 이상 데모에 참여하지 말고 이제 공부나 제대로 해라! 너는 지금 데모할 때가 아니다. 가정이 우선 살아야 하고 부모 형제 전부가 너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고 말했다. 그러나 광석은 “방송국을 불태워서는 안 된다고 시위대들에게 이야기했는데도 군중들이 말을 듣지 않았어요. 군중심리가 너무 무서웠어요. 이렇게 데모를 하면 우리가 불리해지는데…….”하고 말하면서 시위에 대한 염려만 하는 것이었다. 그런 광석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형은 다짜고짜 광석에게 집안에 있는 책을 모두 싸라고 했다. 평소에 알고 있던 주지스님께 부탁해서 동생 광석이를 절에 맡길 생각이었다. 평소에도 형의 말을 잘 따랐던 광석은 형이 시키는 대로 책을 싸는 듯 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했던 형이 화장실에 나가보니 광석은 이미 대문을 나서 저만치 나가고 있었다. 형은 빨리 돌아오라며 고함을 쳤으나 광석은 못들은 척 그대로 달려 나가버렸다. 그것이 형이 광석이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5월 21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밀리기 시작한 계엄군은 광주 전 지역에서 전남도청 일원만을 남기고 모두 후퇴했고 계엄군의 저지선은 전남도청과 주요대학으로 좁혀졌다. 도청 앞 금남로에는 이날 수십만의 시민들이 모여 계엄군과 대치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나선 시민대표들은 계엄군측과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계엄군의 만행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과 희생자들의 장례 등에 관한 시민대표들의 입장을 전달했다. 그런데 협상 결과를 기다리던 시민들에게 갑자기 계엄군은 무차별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설마했던 시민들 대부분은 계엄군의 총격이 처음엔 공포탄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주변에서 시민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사격임을 알았다. 금남로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광석도 그 시민들 속에 함께 있었다. 그리고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을 구하러 도로로 나가다가 계엄군의 총에 가슴을 맞았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