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평생을 저항의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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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평안북도 사람들에 대한 편견은 상당히 깊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남북이 갈리어 더 이상 평안북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공론화 되고 있지 않지만 조선시대 때 이미 집권층들이 조정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다고 하여 소위 반역향이라 낙인 찍었고 서북인들의 등용을 고사하는 일이 길어지면서 홍경래의 난과 같은 일들도 잇다르게 되었다.
실상, 조선의 설립 때부터 이성계 등 집권세력이 서북 무인들의 힘을 근거로 조선초기의 기틀을 잡아나갔으면서도 철저하게 차별정책을 펼친
것이다. 그러한 와중에 자연스럽게 평안도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반골(反骨)로 자리잡아 가게 되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서도 서북인들의 역할은 대부분 남들은 겁나서 나서지 못하는 자리에 총대 메고 나서는 ‘반골’적 인물이 적지 않았다.
특히, 일제침략기에 압록강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던 지형상 항일 독립군들의 전초기지로 자리 잡는 경우가 많아 제국주의에 항거하고 독립을
부르짖는 이들의 자리도 많은 서북인들이 채우게 된 것이다.
홍범도, 김산, 함석헌, 장준하, 리영희 등 일제시대부터 근대사를 아우르는 많은 인물들이 바로 그러한 서북인들의 계보(?)를 이어왔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계훈제 선생, 그 역시 그러한 서북인의 기질을 받은 사람.
1921년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태어났다.
1943년 경성제국대학 1학년 재학 중 일제의 학병 징집을 거부하다가 일본 헌병에 붙잡혀 지원병 훈련소로 압송된 뒤,
평양 인근의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민족해방협동단에 가입해 항일 활동을 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김구(金九) 밑에서 신탁통치 반대 투쟁을 벌이면서 김구의 남북협상을 지지하였고,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학생회장 때에는 국립대학안반대운동을 이끌기도 하였다.
1960년부터 2년간 국학대학 강사를 역임하였고,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뒤에는 재야 민주화 운동에 전념해 1963년 한일회담 반대,
1968년 베트남전쟁 파병 반대, 1969년 3선개헌반대투쟁 등 박정희(朴正熙) 군사정권 반대투쟁에 앞장섰다.
이후, '사상계'편집장과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1970∼1979), 구화고등공민학교 교장(1973∼1974),
민주주의국민연맹 운영위원(1977), 민주통일국민회의 부의장(1984),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의장대행(1985∼1986),
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1987), 자주,민주,통일국민회 의장(1988),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1989),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고문(1991) 등을 역임하였다.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된 이래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3차례 투옥된 것을 비롯해,
1980년에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15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하였고, 이후에도 재야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당한 고문 등으로 얻은 폐질환이 악화되면서 1995년부터 투병 생활을 하던 끝에 1999년 3월 사망하였다.
2001년 10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는 1958년 얻은 폐결핵과 노환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민주화운동보상법이
정한 1969년 8월 7일 이후의 민주화 운동 관련자에서 제외된다는 규정에 따라 보상금 지급을 기각하였고, 명예회복 부분에 대해서도 한 번도
유죄판결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류 판정을 내렸다. 그가 숱한 구속에도 불구하고 '유죄판결'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서슬 시퍼런 군사독재의 칼날도 그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2002년 1월 말에 뒤늦게 그가 민주화 운동 관련자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이 판정에 대한 각계의 문제 제기가 잇따른 후,
2002년 2월, 결국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
그의 묘는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 제일 앞 자리인 '민주열사추모비'옆에 자리 잡고 있다.
아직까지도 가장 앞에 서서 세상을 향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라!'고 외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살아 생전 그의 기개를 다시 보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