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석(高圭錫)
묘역번호: 1-10
생 애: 1941.04.12 ~ 1980.05.21
성 별: 남
출 생 지: 전남 담양
사망원인: M-16 총상
사망장소: 전남 도청 앞
기 타: 농업(새마을지도자)
유 족: 이숙자(처)
“그래, 차라리 날 쏴라. 서방 잃은 년이 뭣이 무섭것냐? 날 쏴라.”
악에 받친 여인의 기세에 눌린 것인가? 이숙자 씨는 군인들을 밀치며 바리케이드를 지나쳤다. 광주교도소 주변 이곳저곳을 살폈다. 교도소 뒤편으로 돌아설 때 흙에 반쯤 덮인 옷가지들이 보였다. 남편의 것이었다. 놀라 맨손으로 흙을 팠다. 남편의 옷이며 넥타이가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되어 딸려 나왔다. 다행인가? 남편은 없었다. 이숙자 씨는 어쩌면 남편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차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서로 뒤엉킨 시체들이 보였다. 계속 그 주변을 파냈다. 한 구덩이에 여러 구의 시체가 함께 들어있는 것도 있고, 한 구씩 묻힌 것도 있었다. 그곳에 남편과 함께 광주에 간 임은택 씨가 있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게 심하게 짓이겨진 채 두 손을 뒤로 묶여 있었다. 그 상태를 보면 죽지 않은 상태에서 끌려 다니다 변을 당한 게 분명했다...
남편은 혼자 묻혀 있었다. 열홀 동안 그리 애타게 찾아도 없던 사람이, 그래서 살아있어 줄 줄만 알았던 사람이, 흙구덩이 속에 묻혀 있었다. 얼마나 무섭고 기가 막혔는지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확인하지도 못했다. 면장님이 해주셨다. 남편이 확실하단다. 확실히 고규석이라는 사내란다...
M-16 소총에 의한 흉부관통상. 조대병원에서 내려진 진단만이 믿을 수 없는 남편의 죽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팠다. 그러나 아플 수도 없었다. 서른넷의 그녀는 다섯 아이의 어머니고, 몸도 가누지 못하는 노모가 자신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가장이었다. 살아야 했다.
“자식들을 훌륭히 키우는 것만이 그놈들한테 내가 할 수 있는 복수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빨 앙다물고 살았어.”
처음에는 바느질을 시작했다. 그러다 대창버스 차고지 옆에서 버스안내양들 군것질거리로 튀김장사를 했다.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버스안내양이 없어져버리는 바람에 그것도 할 수 없게 됐다. 그 뒤로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남의 집과 식당, 방적 공장 3교대 근무, 닭장사……. 참 많은 일을 했다. 지금은 일용직 근로자로 망월묘역 관리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쓰러질 수 없다는 어머니의 강한 마음은 아이들을 굳건히 길러냈다. 딸 셋은 모두 출가시켰고, 아들 둘도 대학에 다닌다. 아버지란 말도 모르고 자란 네 살짜리 코흘리개 막내는 지난 1998년 아시안 게임에서 펜싱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어머니 앞에 섰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