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Photo By Skyraider
시티은행 계좌에서 돈을 찾아 친구들과 양주를 즐긴다.
브리티시 아메리칸 타바코사의 던힐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아이들을 데리고 맥도날드에서 코카콜라를 곁들여 외식을 즐긴다.
신문에서 미군부대 이전 반대를 외치는 몰상식한 것들에게
한 마디 퍼부어준다. '미친 것들, 누구 덕에 우리가 살았는데?'
영어발음을 위해 애들에게 혀 늘이는 수술을 해주고,
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영어시험 TEPS를 받게 해주고,
딸라빚을 내서라도 미국으로 어학연수 보내줘야 한다.
...빗 속의 태극기가 이처럼 쓸쓸히 보인 날이 없었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BGM : Bruce Springsteen - Streets Of Philadelph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