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novel]_ 날개 story[novel]_ 날개 열차는 한적한 상실의 시간대를 지나고 있었다. 객실을 가득 매운 사람들은 액자 속에 갇힌 초상화처럼 정지된 시선을 어디론가 소실하고 있었다. 나를 태운 역으로부터 얼마 동안 이별한 뒤였을까, 깨알 같은 텍스트의 행렬을 집어먹던 나의 시선을 책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아이들의 입성은 말이다. 교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학생임에 틀림이 없는 아이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점하기 무섭게 역동적인 몸짓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수화였다. 나는 읽던 책을 내리고 아이들의 소리 없는 대화를 주시했다. 춤추는 듯한 동작이 연거푸 이어지더니 아이들은 뒤로 자빠질 듯 해찬 웃음을 지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나는 아이들의 몸짓에서 언어를 찾아낼 수 없었다. 뜻 모를 손짓이 부산하게 오고 갈뿐 아이들이 웃는 까닭을 읽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요란하지만 전혀 시끄럽지 않은 대화...“무슨 일이지?”나는 불현듯 장애가 느껴졌다. 저들의 소리 없이 떠드는 능력 하나 가지지 못한 비장애인의 장애를 확인 받은 것이다. “나만 느끼는 감정일까?”나는 슬그머니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들도 같은 장애를 직감한 탓인지, 각각의 표정에선 짙은 어둠이 전염되고 있었다. 이제 보니 비장애인들은 아이들과 단 일 합도 겨뤄보지 못한 채 장애와 비 장애를 맞바꿔 버린 것이 아닌가. 오, 이런... 사람들의 표정은 점차 일그러져 갔다. 여기저기 불편한 심기들이 불쑥불쑥 쏟아지는가 하면, 심지어 일부 비장애인 사이에선 신분이 뒤바뀐 아이들을 향해 불만 가득한 욕설이 퍼부어졌다.“제발 조용히 할 수 없겠니? 너희는 이곳이 열차 안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단 말이냐?” 사람들은 미친 듯이 소리쳤다. “너희의 요란한 대화는 내가 한시도 신문을 볼 수 없게 하는구나.” 일부, 성급한 승객들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자 아이들은 오들오들 떨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 놈들 썩 꺼져라. 너희와 같은 열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구나.” 시간이 더해갈수록 사람들은 완전한 존재에 대항하는 폭도로 변해갔고, 낙엽처럼 밟히던 아이들은 급기야 성난 무뢰배에 붙들려 차창 밖으로 내던져 지고 말았다. “안돼...”나는 황급히 몸을 날려 한 아이의 책가방을 잡았다. 내 손에 붙들린 아이는 다른 아이의 책가방을, 다시 그 아이는 또 다른 책가방을 잡은 뒤에야 가까스로 창문에 매달릴 수 있었다. “우리를 도와주세요. 설마 이대로 내버려둘 작정은 아니겠죠?” 매서운 바람이 우리를 깃털처럼 흔들어 댔지만 누구 하나 구원의 손길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아저씨 걱정말고 손을 놓아버리세요. 이대로 떨어져도 죽지는 않을 거에요.””그래요. 있는 힘껏 팔을 저으면 하늘로 날아오르지 않을까요?”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아이들이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지금 내게 말을 한 거니? 너희는 분명 조금 전까지 벙어리였어.”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한번 객실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요. 아이들이 말문을 열었어요. 내게 말을 걸어왔다고요. 빌어먹을...” 그러나 객실에 가득한 사람 어느 누구도 내 말을 귀담아 듣는 이는 없었다. “아저씨 소용 없어요. 저들은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요.””그게 무슨 말이니? 나는 지금 너희들이 하는 말을 또렷하게 알아듣고 있는걸?”바람은 더욱 매몰차게 불었고 우리의 목숨은 경각에 달해 있었다. “아저씨가 우리 말을 알아듣는 건 당연한 거에요. 우리의 언어는 사람의 언어가 아니니까요.” 나는 아이들이 하는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더 이상 버틸 힘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력을 다해 조금만 참아줄 것을 외쳤지만, 이미 내 손은 허공을 휘젓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끝나는 구나......”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곧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몰려들게 뻔했다. 하지만 시간이 제법 흐른 뒤에도 몸은 아직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추락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자 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보았다. “아저씨는 은빛이네요. 멋져요. 제 날개도 봐주실래요? 나는 흰빛이에요.” “저는 노란빛이에요. 정말 예쁘죠?” “어림없는 소리 내 것이 제일 멋지지. 난 금빛이야, 금빛. 하하하...”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내 몸은 온통 오색 깃털로 휘감긴 채 조금 전까지 책을 들고 있던 손은 은빛 날개로 변해 있었다 하늘은 유리거울처럼 맑고 투명했다. 우리는 질서 정연하게 편대를 이루어 비행하거나 가슴이 터져 버릴 듯 고함을 지르며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녔다. 드문드문 새털 구름이 얼룩져 있었지만 화들짝 놀라 자리를 비켜주었을 뿐 결코 유리거울이 깨지는 일은 없었다. 외려 우리의 날개는 갈수록 윤기 어린 빛으로 물들어 갔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생각보다 작아 보였다. 지상에선 더없이 거대해 보이던 빌딩 숲도 바람을 밟고 선 지금은 그저 티끌처럼 가벼워 보였다. 훅 불면 날아가버릴 것 만 같았다. “대장님.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죠?” 노란빛 날개가 물었다. 나는 어느새 아이들의 대장이 되어있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걸?”솔직한 심정이었다. 내게 날개가 생기리라곤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대장님. 저기 보세요. 거대한 바위산이 보여요. 우와, 그 너머엔 바다도 보이는 걸요?”앞서 바람을 가르던 흰빛 날개가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금빛 날개 역시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어디, 정말 바다가 보이는구나.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우리 눈앞에 펼쳐진 바위산은 설악산이었고, 장엄한 울산 바위 너머엔 검푸른 바다가 하얀 포말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고작 서너 번의 날개 짓이 전부였는데, 바람은 어느새 속초 상공에 우리를 데려다 놓은 모양이었다. 마치, 바다로 간 것은 우리가 아니라 바다 자신이 흘러온 듯싶었다. “전 대원에게 알린다. 전원 바다로 진격하라. 반복한다. 전원 바다로 진격하라.”나는 장난기 어린 명령을 하달했다. 푸른 바다와 어울리는 명령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장의 명령이 하달되자 편대는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바다를 향해 날개를 몰아갔다.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짙은 내음이 코끝을 자극했다. 세상에 그 어떤 향기가 이보다 더 자극적일 수 있을까,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잘 다듬어진 깃털 때문인지 온몸을 흠뻑 적시는 것은 무리였지만, 그만큼 충분히 상쾌하고 즐거웠다. 바다는 진심으로 우리를 안아주었다. 외면하지 않았다. 혼탁해진 마음을 씻어내기 위해 사람들은 여행이라는 이름의 길을 떠난다. 새는 그런 여행자의 전령이며, 바다는 자유로운 영혼을 갈망하는 이들의 성지인 셈이었다. 속초에선 단 한 사람도 새의 눈을 피해 바다로 향하는 사람은 없었다. 태양 조차 새의 호위를 확인한 뒤에야 섬을 딛고 떠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새의 날개를 포용하지 않는 하늘과 섬과 바다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문득 태양을 갖고 싶어 졌다. 사랑하고 싶어졌다. “태양이라면 내 얼어버린 가슴을 녹여줄 수 있을 거야.”나는 태양을 향해 남아있는 자유를 던져버리기로 했다. “얘들아, 저기를 봐. 태양이 대장님을 삼키고 있어”노란 날개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야, 내가 보기엔 대장이 태양을 삼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좋아, 그렇다면 우리도 따라가자. 태양을 모두 마셔버리는 거야.”흰빛 날개가 내 뒤를 쫓으며 소리치자 남은 두 날개들도 태양을 향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대장님 같이 가요. 혼자 마셔버리기엔 태양이 너무 크지 않은 가요?”아이들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지만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나의 눈과 귀는 태양이 가까워질수록 점차 녹아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색 창연한 깃털도 은빛 날개도 모두 흰 잿가루로 변해갔다. 하지만 행복했다. 그리고 느낄 수 있었다. 어제가 기울고 오늘이 잉태되던 순간을,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내일의 영광을... 열차는 한적한 상실의 시간대를 지나 어느 낯선 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긴 한숨을 뿜어내며 정박을 마친 열차는 한쪽 출입문을 열어 비만의 몸을 털어내고 있었다. 무표정한 사람들은 병술년 첫 겨울이 우려낸 햇살을 마시며 일거에 쏟아져 내렸고, 나는 어느새 현실로 복귀해 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분주한 몸놀림으로 자신들만의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대화 어디에도 불필요한 소음은 없었다. 나는 읽던 책을 덮어버리고 양 팔을 번갈아 살펴보며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를 흔적을 찾았다. 그러나 깃털은 한 올도 남아있지 않았다. 은빛 날개로 펄럭이던 손 또한 무겁게 책장을 넘기던 처음 그대로였다. 이런 내 행동이 이상했는지 아이들 중 하나가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와 내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나누었다. “정말 날개가 있었으면 좋겠구나...”나는 뿌옇게 입김을 불어넣은 창문에 날개라는 글자를 적어 보았다. 그러나 입김은 빠르게 산화되었고, 날개는 흔적조차 남지않았다. 나는 그때 분명히 보았던 것 같다. 짧은 순간 내 손등을 타고 반짝이다가 이내 사라져버린 은빛 날개... 해산을 마친 열차는 다시 무거운 몸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친숙한 목소리의 그녀에게서 한참이나 지나친 목적지를 들켜버리고 말았다. 후훗......
나는 나무다
2006-05-03 0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