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사
너무 얕고 작은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대문 아닌 대문을 열면 항상 비스듬한 자세로 처마 밑에 매달려서 댓돌위에 벗겨지고 신겨지는 신발들의 주인들이 겪는 온갖 증상을 주시하고 있는 네 귀도 허술한 까만 테 액자가 있었다.
어려을 적에 고개를 젖혀가며 볼라치면, 저 액자 속에 갓 쓰고 댕기 꽂은 사람들이 누구일까 궁금해 하며 액자 유리에 반사되어 보이던 그 빡빡머리 얼굴이나마 듬성듬성 비어있는 공간속으로 집어넣곤 하여 이제 액자 속 사진으로 당당하게 남아 있다는 안도감?과 우쭐함도 가져보기도 하였던 것이다.
얼마 후인가 그것이 그 애의 첫 사진 이였는지 확실한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진이 비로소 처마 밑 액자 속 다른 사진들에게 조금씩 겹쳐진 채로 비로소 들어앉게 되었던 것인데
그 사진이라는 것이 동네 어귀에 공터에 가끔씩 찾아오던 손수레위에 얼기설기 만들어진 아주 조잡한 무대위에 현란한 원색의 꽃 배경 그림 앞의 듬성듬성 못질한 의자에 앉은 채 주인공만 다르게 찍힌 것이거나, 혹
재수가 좋으면 의자대신 모형자동차 속에 얇은 핸들을 부동자세로 붙잡고 있던 모양이 대부분 이였던 것이다.
그 사진을 찍어주던 그 사진사는 우리의 자세를 고쳐준답시고 그 커다란 아귀힘의 손등보다 훨씬 더 희게 핀 버짐 오른 얼굴이나 턱, 정수리 등에 자국이 생기도록 얼마나 세게 누르고 잡고 돌렸던지......
그러지 않아도 애들은 사진을 찍힌다는 기쁨?과 신기함? 호기심에 눌러 꼼짝을 못하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휘둥그런 눈 깊숙이 눈물도 꼼짝을 못하고 더 커진 눈 속에서 그렁그렁 고인 채 촬영되어 지곤 하였던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얼마나 초롱초롱하고 똘똘한 아이로 찍혔을까?....
그 다음 사진은 말로만 듣던 전차가 다니던 서울의 남대문이나 남산 분수대와 식물원 앞, 어린이 대공원, 창경원, 경복궁 등이었고,
바로 그곳에서 가족 모두가 부동자세로, 정말 알 수 없는 우리의 굳어진 미래처럼 찍힌 사진 이였는데,
그 사진은 집안에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어느 날 갑자기 일가친척의 행사에 부름 받고 서울 가시는 아부지, 엄마사이에 꼽사리껴서 기차타고 가서 무사히 일정을 마치면, 보너스 같이 구경하던 그래도 서울의 사진 이였던 것이다.
그 사진은 동네 친구들을 불러다가 자랑할 만큼의 값어치가 충분하여 적어도 그 사진을 보여준 애들에게 만큼은 사진속의 부동자세로 대해도 끄떡없을 만큼 아주 값진? 것 이였다
그렇게 띄엄띄엄이나마 가족의 역사를 다큐멘터리로 촬영해 주시던 사람은 바로 검은 바탕에 누런 [사진촬영]금박 글씨로 만든 완장을 차고 보무도 당당하게 모든 관광지를 호령하던 모든 그 사진사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니 그때의 그 사진사보다 가족사에 지대한 기록자로 남아있는 사람은 아마 어느 가족에도 없었던 아주 중요한 인물 이였던 것이다
그러한 기억속의 사진사를 가끔 고궁이나 유원지에서 예기치 않게 만날 수 있는 데, 그때의 그 완장은 아니어도, 가느다란 목줄에 걸린 묵직한 카메라나 또는 즉석카메라를 목에 매달고 있지는 않더라도 분명 빡빡머리의 기억 속에는 처마 밑 액자 속에 자리를 잡게 해준 위대한 기록자로 남아 있었음에,
그를 볼 때 마다 그에 대한 존경심이나 아니면 가족사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직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획득되어진 감시자에 대한 불쾌함?에 복수라도 하듯, 이번에는 내가 촬영해 드릴까 묻고도 싶고, 자세를 고쳐 드린답시고 그때의 눈 깊은 곳 눈물을 복수할까 내심 소극적인 응징을 그것도 마음속으로만 해보기도 하는 데.....
사실은 손님 빼앗긴 휑한 고궁이나 공원에서 뻘쭘 하게 서있는 모습을 볼라치면 그 손에 흘린 눈물이 창피하거나, 내 성장기를 사진으로 담았던 사람이 저렇게 볼품 없어진 것에 대한 사실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뜬금없이 연민이 일어나곤 하였고, 솔직히 도둑촬영 이라도 하고 싶은 욕구가 끊임없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물론 용기가 나지도 않았으며, 이제 와서 그런 기억이 뭐 대단한 일 인양 싶기도 하고, 또 변변치못한 사진 실력에 저 위대한? 다큐멘터가 딱히 만들어지는 그림이 어떤 것이 좋을지 몰라 힐끔힐끔 바라다보기만 하였는데,
그 속 마음에는 행여 내가 촬영한 그림이 좋지 못할 경우 어릴 때 쳐다보던 그 사진 액자 속의 우리의 가족사까지도 초라해 보이지는 않을 것인지 막연한 자존심을 세우고 싶은 잠재의식이 꿈틀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평소 다니던 곳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이곳의 해운대, 철지난 바닷가에 와서 분명 떨어져 온 거리만큼은 아니어도 여행자의 마음이 되니 살짝 들뜬 기분이 없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여, 사소한 것에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터에,
타지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익명감이 더해져 다소 흥분한 마음이 또 더해진 탓 이였을까?
해운데 백사장에서 가족사진이 걸려있던 처마 밑 보다 더 높은 깃대에 관광사진사 협회를 궁서체로 인쇄한 깃발을 휘날리며 오고가는 가족들의 가족사를 기록해 드린다는 오직 한 가지 의무감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살아온 삶으로 서계신 저 사진사는 자신의 삶도 저리 치열하게 촬영하셨을까 언뜻 스쳐가는 의문과 함께 해운대 그 넓은 백사장에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참동안 내 시선을 붙잡고 있었던 것인데.....
이번만큼은 좋은 그림이 될지 아니 될지는 차제로 두고 그저 되는 데로라도 사진을 촬영하며 우리의 가족사의 지대한 관찰자로 남겨진 마지막 로맨티스트의 위상을 내가 정리해 주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싶고, 또 더 이상 늦으면 사각 사진액자 속에 촬영된 나의 삶도 복구가 불가능 할 정도로 늦어지지 않을까 불현듯 불안함이 엄습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알량한 재주로 달랑 그저 노력인지 무모함인지 짐작도 아니 되지만, 많은 셔터 숫자에 의지해 좋은 작품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이 때늦은 사진 찍기가 버겁게 여겨지고 있는데......
그것마저도 어이없게 이젠 물리적인 힘이 부족하여 이루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그리하여 더더욱 참담한 생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압박감 왜 그때 묘하게 바닷물처럼 마음속에 일었던지 ......
그것보다 문득 그 집요한 사진에 대한 기억은 비록 어릴 때 살던 집의 처마 밑, 초라한 사진틀에서 시작했지만 사진을 찍힐 때 마다 사진 속 등장인물들이며, 그리고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카메라 속에 담겨지는 모든 피사체는 내 관심과 사랑의 결과물이 아니던가......
젊어서는 용기가 없었다는 변명과 함께 찾아온......
이 뒤 늦 은 사 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