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을 노 인 (수원성)
수원성 한켠에 앉았는 노인....
촛점없이 먼 곳을 응시하며 더 먼 무상을 모으는
노인과 가을나무....
그의 무거운 뒷모습엔 더 버거웠던 삶이 묻어난다.
하나의 삶을 살아 내면서, 난 훗날 흡사 저 노인처럼 가을이면 공원벤치에 앉아 허망한 세월을 허허롭게 즐기고 싶다.
내가 살던 동네의 주 생업은 농사였다.
지금도 가끔 고향을 찾아가면 김씨, 이씨 아저씨들 술과 농업에 찌들어
거죽만 남은 산 송장과 다를바 없는 까만얼굴로 웃어보인다.
그러면서도 입가엔 채 마셔내지 못한 알콜냄새가 풍기곤 했다.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었고, 허리 휘게 일하곤 해마다 수확을 맞으나....
차, 포 띠면 남는게 없는 형편은 작년과 다를바 없어진다.
아주 오래전 내 아비도 맘을 고쳐먹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수확을 하면서 느낀 벅찬 감정은 온전히 용서였고, 가장에 대한 새로운 신뢰의 싹이었으되....
땅주인 떼어주고.... 동쪽가게, 서쪽가게 돌며 그간 마신 외상술값 가마니 수로 세다보니 텅빈 고물경운기,
그놈을 운전하는 텅빈 인생의 아비, 아비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텅 텅 비어버린 아들놈만 덜렁 남아 있었다.
난 일년이 억울하여 그 가마니를 수확했던 논으로 뛰어간다.
농기계가 휘젓고 지나간 거대상처만 남은 논바닥은 흉물스럽기만 하고, 난 더없이 떨어진다.... 끝으로 끝으로.
이제 서른이 되어 그 고향, 그 시절을 돌아보면
배고프고, 춥고, 절망적인 느낌이 그대로 추억이 된다. 가을 나뭇잎보다 더 노란 그리움이 되어버린다.
더 시간이 흘러, 나 노인되었을 땐
추억과 그리움을 넘어 할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질 게다.
딸딸!! 굉음을 내는 경운기 뒤에 앉아 술취한 아비등을 보며 살을 후벼파는 그 겨울 추위에도 콧노래를 부를 것 같다.
그렇기에 지금 단 하루, 한 시간도 허비하지 말아야겠다.
언제고 이 시절을 간곡하게 추억할 지 모를 일이기에. 이리 힘든, 내 삶의 지금 이 마디를 간절해 할 것이기 때문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아비는 늙어 술에 취해 꼭 여까지만 여러번 중얼거리다 잠이들곤했다.
그러나 삶은 한 번도 아비를 속이지 않았다. 되려 아비가 늘 삶을 희롱하고, 속였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