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iration of Andy Warhol- 채색캠벨스프깡통, 2005, 548X938 워홀 (Warhol, Andy 1928.8.6~1987.2.22) 1928년 8월 6일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하였다. 피츠버그의 카네기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52년경부터 뉴욕에서 상업디자이너로 활약하다가 화가가 되었다. 1962년 시드니 재니스화랑에서 열린 ‘뉴리얼리스트전(展)’에 출품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하고 그 후 만화의 한 컷, 신문보도 사진의 한 장면, 영화배우의 브로마이드 등 매스미디어의 매체를 실크스크린으로 캔버스에 전사(轉寫) 확대하는 수법으로 현대의 대량소비문화를 찬미하는 동시에 비판하여 이름을 떨쳤다. 1963년부터는 《슬립》 《엠파이어》 등 실험영화 제작에 힘쓰고, 상업영화에 손대는가 하면 소설도 출판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여 1960년대 미국 예술계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1994년 9월, 호암갤러리에서 그의 팝아트전이 개최되었다. 주요저서에 《1970년대의 조망》 등이 있다. 미국의 팝아트의 대표라면 앤디 워홀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실크스크린이라는 대량 복제가 가능한 인쇄 방법을 이용하여 반복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는 광고의 속성을 차용한 것으로 현대의 대중 문화에 걸맞는 예술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워홀은 대중적 이미지 뿐아니라 공포의 이미지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영화 배우와 같은 유명인들, 꽃, 코카콜라병, 또는 전기의자, 자동차 충돌 장면, 폭풍의 현장 등을 캔버스 위에 반복적으로 묘사하여 거의 임의적인 색채를 첨가함으로써 미묘한 효과를 보여준다. 워홀의 작품은 대량 생산품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는지 끔직한 장면이나 유명인들에 대한 반응을 마비시키는 등의 결과를 초래한다. 그는 대중적 속물주의를 정착시켰다. 특히 동어반복적 표현을 통한 작품의 유일무이성 부정, 오리지낼리티의 부정 등은 후에 추상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나는 원래 상업미술가로 시작했는데 이제 사업미술가로 마무리 하고싶다. 사업과 연관된 것은 가장 매력적인 예술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미술은 심오한 정신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오락적, 일상적 '상품'으로 취급하여 미술의 새장을 열었다. 팝아트는 엄청난 상업성을 위해 미국미술 의 정신성을 포기한 장르다. 1960년대 초 워홀은 헐리우드의 요부들과 켐벨수프깡통 이미지의 야한 실크스크린 작품들로 미술계를 뒤흔들었다.그것은 밝고 조야한 색채, 그리고 전세계는 생 산된 제품일 뿐이 라는 그의 차가운 메시지 때문이다. 모든 것이 판매를 위한 생산라인 이미지로 격하 될 수 있다면, 마릴린·엘비스·브릴로 는 모두 현금으로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워홀은 자신의 이력을“나는 상업적 예술 가로 시작했고, 실업적 예술가로마무리짓고 싶다.” 고 요약했다 . 워홀은 자신의 본업에 관계없이 미술은 물론 록밴드를 지원하기도하고, 잡지<<인터뷰>> 를 창간하기도 했으며,TV에 카메오 출연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당대의 번쩍이는 네온사인 역할을 했다. 사후에도 그 네온사인은 쉽게 빛을 잃지 않았고 , 그의 명성은 미술계를 떠돌 았다. 워홀처럼 언론에 의해 명성을 얻는 미술가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미국의 제프쿤 스와 영국의 다미엔 허스트 는 그 대표적 예다.
열대어_Tropical_fish
2005-11-11 1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