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 (靑燕)
대사 : 저세상 끝까지 한번가보는게 내소원이야...알아...
모델 : 박진영
장소협조: 칠곡 에어랜드비행장 관계자분께 촬영협조 감사드립니다.
조명 : 600W 로케이션 2등..
이사진 셔터누르는순간의 흥분은 어떤 월척의 손맛보다도 좋았다...
다시금 이런 느낌 가져볼수있을런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 그녀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비행긔를 터져서 죽는 두려운 물건으로만 생각하오. 그러나 나는 긔여히 비행가(飛行家)로써 성공을 하야 남자에게 지지 안는 활동을 하겟소"
-박경원, 1925. 7. 5. 동아일보 인터뷰 중에서
박경원은 1901년 6월 4일 대구 덕산정에서 가난한 집안의 6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제비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명신 여학교에 입학했지만 2학년으로 중퇴했다. 16살이 되던 해, 1917년, 그녀는 하늘을 날고 싶은 자신의 꿈을 위해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갔다. 우선 돈을 벌기 위해 요코하마에 있는 공예 강습소에 입학했지만 여의치 않아 1920년 결국 귀국하게 되었다. 그녀는 조선에서 자혜 의원 조산부 및 간호과에서 공부하여 졸업 후 3년간 부지런히 돈을 모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우선 비행 조종 예비 훈련 과정을 밟기 위해 도쿄 가마타 자동차 학교에 들어가 운전사 시험에 합격했다. 드디어 1925년 박경원은 '다치가와' 비행학교에 입학했다. 그녀는 학교의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33명의 학생 가운데 6명만이 여자였고, 그녀만이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늘 당당하고 남학생들과 겨루어 절대 뒤지지 않는 실력을 연마해 나갔다. '여자는 엉덩이가 커서 비행기 조종은 무리'라는 성차별의 조롱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꿈을 키워나갔다. 이렇게 꿈에 그리던 비행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비행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다. 비싼 기름 값을 마련하기 위해 밤낮으로 간호사 일과 택시 운전을 해가며 열심히 돈을 모아야 했다.
박경원은 마침내 1928년 7월 30일, 고등비행사 자격증을 땄으며 비행 레이스에 나가 여성으로서는 언제나 혼자 입상했다. 비행학교에서는 그녀를 '학교의 꽃이자 머리 좋은 미인'으로 칭할 정도로 인정을 받았으며 학교를 마칠 때는 수석으로 졸업하여 남학생들이 졸업장을 찢어버리는 소동이 있었다. 당시 조선인 여자로서 비행대회에 출전하는 기회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의지를 가지고 도전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