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 랑 (충남 부여 무량사앞) 그녀와 처음 만난것은.... 20여년 전 7월 경이다. 어미와 그 넓은 밭에 고랑을 내다 몰래 도망쳐오던 철부지 시절. 붉은 흙의 밭을 탈출하긴 하였으되 일곱살 꼬마의 자유는 학교 운동장이면 충분했다. 그네! 그네는 꼬마에겐 정직한 유희였다. 이미 가난한 자의 삶의 태도를 얄밉게 배워버린 녀석은 체중의 탄련과 무릎관절의 반동에 따라 그 높이가 차등되는. 꼬마처럼 시골촌놈으로 자라 이미 나이에 맞지 않는 근력이라면 그 누구보다 높이 올라 학교너머 먼 미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놀거리 였으므로. 꼬마는 그네타기를 좋아했다. 예쁘게 치장한 어미가 있다고 하여, 컬러텔레비전이 있다고 하여, 아비가 그럴싸한 양복을 입고 다달이 많은 월급을 가져다 준다고 하여, 철마다 좋은 옷을 입는다고 하여, 소 밥을 주고 유치원에 가야하는 궁상을 부리진 않는다고 하여, 어미 아비와 외식을 자주한다고 하여.... 하여서, 더 높이 올라 갈 수 있는 '그네'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꼬마만의 무엇보다 공정한 유희였다. 칠월의 해는 뜨겁다. 멀리서 아지랑이와 섞여 흐물대는 소녀의 형상이 점... 점... 점... 가까워진다. 내가 타고 있던 두꺼운 통나무 재질의 그네 발판에 소녀는 머리를 부딪친다. 운 명 이 다 그레이톤의 그 오랜 추억끝에 그녀의 이마에서 흐르던 피의 빛깔만은 늘 붉은 색으로 기억된다. 그런 그녀를. 왼쪽 가슴에 흰 손수건을 길게 달고 어미손에 끌려 갔던 국민학교 입학식에서 본다. 역시 운 명 이 다 그때부터 꼬마는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사랑이 뭔 줄도 모르면서 사랑하게 된다. 때론 소녀를 괴롭히면서, 때론 함께 울면서, 때론 저 우체통을 찾아 긴 겨울 들길을 걸으면서.... 방학숙제 중에 '편지쓰기'가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소녀에게 전화를 했다. 저 우체통 만큼이나 빨간 고물 전화기로 32-2980(지금 번호 다 바뀌었으니 전화 해보면 대략 난감) 숫자를 눌러 수화기 너머 아련하게 들리는 그네 목소리를 확인하고, 우린 함께 편지를 보내러 가기 위해 소녀의 집앞 작은 다리위에서 만났다 어색하게. 경성고등학교 아래로 난 들길. 길 왼편으론 냇물이 흐르고, 냇물 건너 학교동산엔 밤나무가 흉물스럽게 몸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오늘은 나와 내가 사랑하는 소녀가 우체국에 가는 날이다. 당연히 하늘은 눈을 내려 가난한 소년과 그 소년이 사랑하는 소녀를 축복해야 했다. 실제로 내렸다 하얀눈이. 실제로 하늘은 나와 내가 사랑하는 소녀를 축복해 주었다. 엷은 바람과 알맞게 포근한 함박눈이 칙칙한 느낌의 밤나무 동산과 들길 오른편의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는 논을 '카바'해줬다. 그리하여 소년에게 소녀에게 그 날 그 들판은 그대로 '동화'가 되어 주었다. 나는 부는 바람보다 더 엷은 몸짓으로 그네의 손을 잡았다. 그 해 그 겨울은 참 따뜻했고, 가난과 남자같은 어미와 사람대접 못 받는 아비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난 우체국으로 향하는 이 길이 끝나지 않고 멀리 멀리 이어져, 둘이 함께 먼 바다까지 걸어 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 또 생각했다. 유난히 말이 없는 그녀는 조용히 나와 함께 이 길 끝까지 걸어 줄 것만 같았다 그때는. 철부지 꼬마의 바람은 그저 허공에 빈 바람으로 끝났고, 우체국은 얄밉게 그 길 끝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버티고 있었다. 붉은 간판의 우체국은 '그만 손을 놓을 것'을 우리에게 암묵적이고 일방적인 지시를 하고 있었다. 천운으로 우체국은 이미 문을 닫았고, 우린 저 사진과 같은 우체통을 찾기로 한다. 더 긴 시간 소녀와 우체통을 찾아, 그 잿빛의 와우리 거리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 피빛의 붉은 색을 뒤적이며 헤맸다. 대한어머니 공판장 벽에 붙은 작고 빨간 우체통에 우린 서로의 이야기가 담긴 편지를 넣었다. 그리곤 정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올 때 느꼈던 따듯함에 감사할 틈도 없이, 편지를 넣고 돌아서자 소녀의 집이 마술처럼 나타났다. 욕심스럽게 다문 꼬마의 입에선 침묵만이 주절대고, 우린 서로의 길을 걸었다 다시 만날 날까지. 지금 그녀는 저 아래,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한 아이를 낳고 자알 살고 있단다 나와는 별개로. 이십년도 넘었을 그 시절이 주책스럽게 그리워지며, 이십년 전 소녀의 이마를 흐르던 피가 내 이마에서 붉게 흐르는 것 같다. 금방이라도 손을 넣으면 그녀와 내가 쓴 편지가 잡힐 것 같다. 빨간 우체통만 보면....
kundera
2005-10-24 1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