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꽃무릇 선운사에 꽃무릇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이른데 올해 구근을 옮겨 심은 요사채 쪽에는 일찍 피었다네요. 추석 무렵에 피크가 될 것 같습니다. 보기만 해도 서럽도록 아름다운 꽃인데 사연까지 곁들이면 더 서럽습니다. 선운사 위의 창담암은 비구들의 수행도량입니다. 그 암자에 수행에 정진하는 용모 준수한 비구가 한 분 있었습니다. 어찌나 열심이든지 모든 수행자들의 모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손위의 스님들도 총애하는 비구였습니다. 어느날 이 비구가 본찰인 선운사에 일이 있어 내려왔다가 문득 한 눈에 한 비구니에게 빠져들게 됩니다. 역시 수행중인 비구니였는데 아름다운 용모만큼이나 열심히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비구니 역시 비구를 보고 묘한 감정에 빠져 들게 됩니다. 두 사람은 곧 서로에 대해 정보를 알아보고 마음 한 구석에 서로에 대한 마음을 키워 갑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불제자가 되기로 약속한 사람이었고 절대로 그 약속을 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 수행에 정진하며 그 마음을 눌러보려 애를 씁니다. 그러나 수행은 수행이고 사랑은 사랑이었습니다. 속세의 사랑은 아닐지라도 열심히 수행하는 서로의 모습을 깊이깊이 흠모하게 됩니다. 서로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게 됩니다. 비록 불제가가 품어서는 안 되는 마음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서로를 흠모하고 서로를 맘속으로 아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승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리고 이승에서 사랑을 이루기 위해 파계를 하는 것은 생각도 못해봅니다. 두 사람에게 어느날 같은 소원이 생깁니다. 같은 날 같은 때에 죽어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남녀로 다시 태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불제자의 몸으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소원 또한 꿈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랫 마을에 호열자(콜레라)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꺼렸지만 비구니는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마을로 내려가 환자를 돌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비구 또한 자원해서 마을로 내려갑니다. 둘은 혼신의 힘을 다해 환자들을 돌봅니다. 그리고 잠시나마 가까이 지내게 됐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그러나 불심도 전염병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호열자에 걸려 다른 환자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합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같은 날 같은 시에 죽겠다던 소원은 이룬 셈이었습니다. 저승사자의 인도를 받고 두 사람을 보고 염라대왕은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열심히 수행하고 남을 위해 희생하다 죽음을 맞게 된 두 사람인 것을 염라대왕도 알지만 불제자로서는 갖지 말아야 할 사랑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도 염라대왕은 알았습니다. 관행대로라면 두 사람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염라대왕은 두 사람에게 이런 벌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염라대왕은 두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고. 두 사람은 대답합니다. 죄가 큰 줄은 알지만 최소한의 자비를 베풀어줄 수 있다면 무엇이 되어도 좋으니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한 몸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고. 염라대왕은 그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짐승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축생)이 너무 가슴이 아파 풀로 태어나게 합니다. 그 풀이 바로 꽃무릇입니다. 구근에서 잎이 나와 푸릇푸릇하게 자랍니다. 푸릇푸릇한 잎은 비구의 현신입니다. 그런데 잎이 있을 동안 그 어디에도 꽃은 보이지 않습니다. 꽃의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잎이 다 말라버립니다. 이제 다시 구근만 남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 꽃의 한 해가 다 끝났다고. 그런데 가을이 되면 갑자기 구근 속에서 쑤욱 대궁이 하나 올라옵니다. 그리고는 서럽도록 붉은 이 꽃이 핍니다. 이 서러운 꽃은 비구니의 현신입니다. 꽃이 피어 있을 동안 그 어디에서도 잎을 볼 수 없습니다. 잎의 흔적도 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꽃이 피다 지면 꽃무릇의 한해가 끝납니다. 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한 몸이 아닙니다. 비구는 잎이 되고 비구니는 꽃이 되었지만 둘은 절대로 만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잎은 꽃을 위해 구근에 양분을 저장하고 꽃은 그 양분으로 피어납니다. 비구와 비구니였을 때의 삶처럼 둘은 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여전히 만나지 못하며 서로를 그리워만 합니다. 보면 볼수록 서러운 마음이 듭니다. 사진 속의 나비는 어쩜 비구가 보낸 것, 혹은 비구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DrySoul
2005-09-08 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