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모란봉 교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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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8. 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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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사진이지만
다시 보고 싶은 사진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아서 ‘후회’한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인데도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미루다 결국 기회를 놓쳐 후회하게 된다. 처음 금강산 기행 접수가 시작되었을 때 사실 갈까 말까 여러 번 망설였다. 작년처럼 망설이다 결국 못 가게 되는 건 아닌지, 학교에서 가는 건데 별로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지금 갈 수 있을 때 가야 한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신청했다. 무려 3:1의 엄청난 경쟁을 뚫고 당당하게 당첨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선발자 명단에 눈 익은 이름이라곤 단 하나, 바로 내 이름뿐이었다. 오리엔테이션 당일까지도 혹시 나 혼자라서 외로운 여행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었으나 3일 후,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모두 한 가족처럼 가까워졌고 평생 잊지 못할 추억과 가슴 깊은 슬픔을 담고 왔다.
이번 금강산 기행은 내 생애 첫 해외 여행이었다. 생애 첫 해외 여행지가 바로 같은 민족국가인 “북한”이 될 줄이야. 방북(?) 전 까지는 북한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구체적으로 와 닿지 않았는데 지난 반 세기 동안 전혀 다른 나라가 되어버린 그곳의 모습에 때로는 두려움을 느꼈고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나게 된 사실에 여러 번 감사했다. 비무장지대를 지나 북녘 땅에 들어설 때 마치 낯선 이방인을 보듯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어린 북한 병사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리 또래의 그 친구들을 그렇게 만든 그 무엇에 화가 치밀기도 했고 남은 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그 친구들을 생각할 때면 가슴이 시렸다.
특히,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을 보며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알 수 없는 슬픔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이 어린 그 친구들이 그토록 위험한 공연을 위해 도대체 얼마나 힘들게 연습했을까.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것일까. 도대체 누구를 위한 공연인 것일까. 우리가 남쪽 땅에서 온 같은 민족의 또래 친구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저런 생각과 걱정으로 내 마음은 뒤엉켜있었다. 마지막 순서인 공중곡예 중에 발생한 한 여자 단원의 실수에 가슴이 철컹 내려 앉을 것만 같았다. 아찔한 순간이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진 것이었다. 내 두 눈은 신기에 가까운 공연에 감탄했지만 내 가슴은 공연 내내 흐르는 눈물로 흠뻑 젖었다. 정말 미안했다.
2박 3일 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많은 것을 경험하고 생각하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한 폭의 동양화 같은 금강산의 절경과 옥처럼 맑은 물을 보고 우리나라의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시 알게 되었으며 함께 지냈던 친구, 동생들과의 만남은 그 어떤 MT나 다른 행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익했고 앞으로 그때의 추억을 간직한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갈 것이다.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것은 지난 50년간의 남북분단이 남긴 상처와 그 아픔을 비록 조금이나마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건너 편 동네가 어느 곳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누군가를 위해 매일 똑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그들의 비참한 모습에 무력한 내 자신이 죄송스러웠다. 자유롭게 말하고 움직이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이번 금강산 기행을 통해 배웠다. 불편한 숙소에 TV도 핸드폰도 없는 3일이었지만 내 가슴까지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파도 소리에 잠을 청했고 비록 아쉬움이 남지만 여러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얘기하며 솔직해 지는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 날 아침, 비무장지대를 지나 남한 군인들이 멀찌감치 눈에 들어오자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마음 속 한 켠엔 슬픔과 미안함 그리고 희망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비록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같은 민족이며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이제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맑게 개인 하늘을 보며 비무장 지대 건너 편에서 같은 하늘을 보고 있을 북쪽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