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조 (悲 朝) 혹시 아이는 전생을 궁중에서 보내진 않았을까... 아이가 바라보는 것은 이미 쇄락해버린 왕조의 화석 경회루 옛 영화를 떠올리기엔 너무 늦었을까요?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비(妃) 줄리아 리(82)여사가 7일 밤 인천공항을 통해 하와이로 떠났다. 휠체어에 몸을 실은 줄리아 여사는 “심신이 피곤하고 지쳤다. 몸을 추스린 뒤 10월이나 11월쯤 내 집(home)인 한국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며 “서울 도심에 거처도 임대로 마련했다”고 밝혔다. “지난 7월 28일, 경기도 남양주시 영원(英園·영친왕 묘역)에 있는 이구씨의 묘소를 참배했습니다. 그를 묻은 직후에도 비가 왔다던데, 그날도 비가 몹시 쏟아지더군요.” 일본 도쿄의 아카사카프린스 호텔서 세상을 떠난 황세손 이구씨의 장례식이 있은지 나흘 뒤다. 이혼 23년 만의 ‘재회’는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이뤄졌다. 후사가 없다는 이유 등을 내세운 이씨 종친회 등의 압력 때문에 이혼당했지만, 그는 “내 사랑 ‘쿠’(koo)를 죽기 전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만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밝혀왔다. 1958년 미국에서 이구씨와 결혼한 그는 후사(後嗣·대를 잇는 자식)를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종친의 이혼 압력을 받았고, 결국 1982년 이혼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지낸 그는 얼마 전 뇌일혈로 오른손이 마비된 데다 높은 혈압과 관절염 등으로 투병 중이다. 두 사람은 이름난 건축가 아이 엠 페이(I. M. Pei·루브르 박물관 피라미드 설계자)의 뉴욕 사무소에서 처음 만났다. 줄리아 여사가 다니던 이 회사에 입사한 이구씨는 마치 한편의 영화처럼 그에게 다가갔다. 줄리아 여사가 스페인으로 이주하기 위해 아파트를 내놓는다는 사내 광고를 붙였고, 이 광고를 보고 찾아간 황세손은 “스페인에 가지 말고 나랑 사귀자”고 제안했다. 줄리아 여사는 결혼 이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영친왕 내외와 가까이 살면서 매일 넷이 저녁을 함께 먹고 산책하던 신혼 초의 하와이 시절”을 추억했다. 1963년 영친왕 내외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뒤 줄리아 여사는 시어머니 이방자 여사가 운영했던 장애인 복지재단 명휘원(明暉園) 일에 헌신했다. 줄리아 여사가 디자인해 장애인들이 만든 패치워크 작품은 독특한 감각으로 인기를 얻었다. “같이 가주신 신부님이 헌화하는 동안, 저는 ‘안녕’(hello)이라고 말을 건넨 뒤 기도를 올렸지요.” 하지만 어떤 기도를 했는지, 주변에 서운한 감정은 없는 지 등 자신의 감정을 일절 드러내지 않았다. 줄리아 여사는 이구씨와 이혼(1982년)한 뒤 한국과 하와이를 오가며 지내왔다. 장애인들이 손가방과 지갑을 만드는 작업을 돕고 있는 그는 지난 4월 종묘대제(宗廟大祭·조선의 역대 왕 등에게 드리는 제사) 참가와, 자신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마지막 황세손비’(가칭)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한국에 와 머물던 중 전(前) 남편의 부음(7월 16일)을 접했다. 그러나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측이 그에게 공식적으로 부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창덕궁 낙선재에 마련된 빈청도 찾지 못했다. 종묘 앞에서 있었던 황세손의 노제(路祭)를 길 건너편 세운상가 앞 길에서 1시간 30분 이상 홀로 기다린 끝에 사람들 틈에 숨어서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때문에 종친회 내부에서조차 “줄리아여사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이번 방문에서 그가 무엇보다 소원했던 것은 ‘평생의 사랑’이었던 전 남편 이구와의 만남. 그러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그는 전 남편을 만나 직접 전해주고 싶었던 조선왕가의 유물과 한국의 근대사 주요 사진 500여점을 덕수궁 박물관에 기증했다. “저를 그냥 내버려 둬 주세요. 다만 제 고향이 한국이라는 사실 만큼은 사람들이 알아 주었으면 합니다.” 간간 우리 말을 섞으며 줄리아 여사가 남긴 당부였다. -기사는 각 신문 일부 발췌 보존을 이유로 개방한 경회루, 지나간 왕조의 영화. 마지막남으신 황세손비의 사랑... 두분 사랑 영원하시길.... *저도 말손(末孫)이긴 합니다만, 눈물이 핑 돌더군요.
Croqu!s
2005-08-08 0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