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가장 큰 달동네였던 난곡을 아십니까 2000년..대학교 1학년이던 저는 처음으로 난곡이란 달동네를 갔습니다. 그저 말로만 듣던 "달동네"에 가게 된 것은 촬영을 하기 위해서였죠. 난곡이란 곳이 있는 줄은 저희 동아리 선배들이 98-9년경쯤 우연히 발견하였고 그 뒤 저희 동아리 사람들이 많이 찾게 되었죠. 금호동 재개발 아파트 역시 많은 선배들이 필름에 담아왔었다는데 제가 1학년 때는 난곡이 단골 촬영지였습니다. 주로 다큐적인 색채가 강한 저희 동아리라 난곡에는 참 많이들 갔는데 저는 그 때까지도 가서 그걸 찍어야하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다들 가서 찍어오니 가보기는 하는 거지만 이걸 왜 찍어야하는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냥 나와 다르니까..불쌍해보이고..거친 시멘트의 질감과 복잡한 골목등이 흑백으로 참 어울린다는 그런 것 외에 그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댈만한 어떤 정당한 이유도 그 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남들이 찍으니 찍어오는 다른 동기들의 난곡 사진들에 상당한 거부감을 느꼈었고 그렇게 의미없이 찍을바엔 안찍고 만다며 저는 난곡을 거의 들르지 않았습니다. 가끔 동아리 여자애들이 난곡에서 아이들을 찍다보면 갑자기 부모님이 나타나서 애를 데리고 획 가버리며 "왜 애들 찍어요?" 그럽니다. 당황한 동기들은 "애들이 예뻐서 찍었어요 아주머니.." 그러죠. 물론 맞는 말이지요. 애들은 누구나 예쁘죠. 그러나 아주머니의 마지막 말에 아무도 답을 하지 못합니다. "부자 동네에는 애들 없어요?" 애를 데리고 가는 아주머니의 뒷모습만 쳐다보죠. 그 때 무슨 말을 해야할까요..저는 그당시 분명 그 답을 못 찾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난곡을 비롯한 무허가 주택들이 위치한 구룡마을 등에서의 촬영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을 기만하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도 어쨌든 한번은 난곡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역시나 한 동안을 경사진 길들을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좁은 골목을 헤집고 다녔지만 뭐하나 딱히 카메라를 들이댈만한 것은 없더군요. 나물 다듬던 아주머니들과 얘기 몇마디 나누고 사진을 몇장 찍기도 했지만 크게 의미없는 사진이었고 하반신이 좋지 않아 보조기구에 의지해 힘겹게 걸으시는 할머니 한분을 찍기도 했지만 역시 '불쌍해서' 찍었을 뿐이었죠. 돌아서고 나면 정말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그러다 놀이터 옆의 한 유치원에 들렀습니다. 유치원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놀이터와 그 유치원 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네요. 잠시 머뭇거리다 유치원에 들어갔습니다. 유치원의 아이들을 찍어도 되겠냐고 원장 선생님께 여쭤봤습니다. 거절 당해도 할 수 없다고 들어선 걸음인데 생각보다 혼쾌히 선생님께서는 허락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원장 선생님께서는 한가지 조건을 붙이시더군요. "달동네 아이들..이런 식으로 제목 안쓰실꺼죠?" 위 사진의 아이들이 달동네 아이들로 보이십니까? 아니..달동네 아이들은 어떻게 생긴 아이들이 달동네 아이들입니까?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입니다. 제가 조금은 어색해하며 유치원에 들어선것에 반해 아이들은 너무나도 저를 좋아하더군요. 서로 자기 찍어달라며 달려들고 좀 가만히 있어보라고 해도 서로 밀치고 깔깔거리고 포즈잡고 렌즈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바지자락을 잡고..정신이 없었습니다. 가져간 필름이 tmx100이라 셔터스피드도 1/30이하로 떨어져 흔들렸고 조리개가 개방되니 심도도 얕고 아이들이 움직이니 초점도 나가고..돌아와서 현상을 과다로 하는 바람에 콘트라스트 마저 과다하게 되어 사진 기술적인 면으론 정말 0점입니다. 그렇지만 난곡하면 전 이 아이들 사진이 제일 소중하네요. 무겁기만 할것으로 지레 예상하고 갔던 난곡에서 전 이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희망을 느낄 수 있었죠. 지금은 남들보다 조금 덜 잘살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밝고 건강하게 웃는 아이들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갖고 있었죠. 유치원을 떠나는 저를 문앞까지 따라나와 또 오라고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뒤로 하며 저는 난곡의 경사진 길을 내려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뒤로도 저는 역시 다큐를 해야겠단 생각을 하지 못한채 여전히 다큐를 빙자한 몰래찍기나 가식적인 다큐흉내가 싫어 난곡은 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뒤늦게 다큐를 해야겠단 생각이 든 것은 난곡이 본격적으로 철거되기 시작한 후였죠. 그제서야 아차 싶었습니다. 왜 많은 기록을 남겨놓지 못했나 하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습니다. 기록을 남겨둬야겠다는 것..그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때 부터 사진을 찍었지만 그 제서야 다큐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한거죠. 그래서 2002년 가을 여자친구와 함께 조용히 난곡에 들렀습니다. 이미 난곡은 상당히 많이 변했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난곡을 떠났고 포크레인은 작은 집들을 부수고 있었고 갈곳없는 이들은 떠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보상문제를 둘러싼 대자보가 여기저기 붙어있고 철거라고 붉은 스프레이로 휘갈긴 집들이 텅빈채 있었습니다. 그 즘 난곡에는 화재가 빈발했는데 떠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용역깡패들이 방화를 하는 것이란 소문조차 나돌고 있었죠. 너무 늦었다는 생각 뿐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치원도 모두 부서져버렸더군요. 허무하게 부서진 그 유치원만을 필름에 담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아직 자전거 수리가게를 지키고 있던 한 할아버지도 만났었는데 그 분은 6.25 전쟁과 월남전에 참전하신 국가유공자셨습니다. 빛바랜 훈장을 아직도 간직하고 계신 그 할아버지께서는 그 허름한 가게에서 홀로 쓸쓸히 계셨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아온 그 분께서 그렇게 초라한 말년을 보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조차 너무나 납득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께 정중히 부탁하고 촬영을 했었죠. 그 뒤로 난곡은 더이상 가볼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아마 지금쯤 아파트가 높이 올라가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3년전의 흑백필름들을 보다 보니 이 사진 속의 아이들이 얼마나 컸는지 어디서 살고 있는지 너무 궁금해집니다. 이 사진 속의 밝은 미소 그대로 밝게 자라고 있겠지요. 꼭 그러길 빕니다. 글이 많이 길었습니다. 원래 사진은 사진으로 얘기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난곡에 대한 저의 생각을 사진 한장으로 말할 만큼의 수준이 되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몇장만 더 올려볼 생각인 난곡의 이 아이들 다른 사진에서는 최소한의 언급만 하겠습니다.
PIYOPIYO
2003-08-06 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