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난 얼굴, 화난 마음 광고주 시사 며칠 전부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무언가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에서 검은 말과 악의와 밀약이 오가는 것을 느꼈다. 광고주 사장은 터무니없는 트집을 패악스럽게 쏟아내며 실무자들의 마음에 죽죽 상처를 내었다. 이번 시사엔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담당 PD만 들여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인 것을 안다. 나는 이 팀의 디렉터다. 책임져야 할 책임도, 사실은 책임지지 않아도 될 책임도 내가 지는 것이다. 시사는 잘 되었다. 바로 어제도 한 트럭 분량의 악을 쏟아낸 사장은 조금 미안했는지 별다른 거친 말이나 욕 없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언제나처럼 이어지는 무지하고 형식적이고 정치적인 질문들... 사장이 사장다워 보이려고 내뱉는 질문의 위악, 부장이 부장 자리를 굳히려고 던지는 질문의 위악, 차장이 부장보다 잘나 보이려고 던지는 질문의 위악, 사원 대리들이 놀지 않고 월급값을 하고 있다는 표내려고 던지는 질문의 위악. 질문할 필요 없는 질문들이 그렇게 한참을 이어지고 내심 이제 지루하고 역겨운 오늘의 사열이 끝나가는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사장은 또 하나의 꼬투리를 찾아냈다. 짜증스럽고 무례한 역정이 토해지고 방안의 우리들, 그리고 광고주 자신의 직원들까지도 얼어붙고 난 다음에야 사장은 만족스러운 무표정이 되었다. 물론, 누구도 잘못한 게 없는 일이다. 사장 혼자만 멀쩡히 PPM노트에까지 인쇄되어 있던 문구를 기억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부러 기억하지 못한 척 한 것일 뿐.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고, 나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카피라고 하자 사장은 스케쥴 문제로 포신을 돌려 또다른 악을 쏟아붓는다. 왜 고칠 시간을 충분히 갖지 않고 이렇게 급하냐는 것이다. 그건 당신이 수많은 트집을 잡고 매분마다 변덕을 부려 제품 출시 직전까지 광고 아이디어는 고사하고 자기 직원들에게 제품명이며 패키지 디자인까지 무엇 하나 결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대답하려 하였다. 광고주 사장 심기가 안좋다는 보고를 받고 오늘 죄없이 실무자들을 따라 들어온 제작이사님이 하얗게 경직되어 있었다. 멋진 은발의 그 노선배를 바라보며 나는 참았다. 올해 대학에 들어갔다는 당신의 큰 아들과 매일 아침 미처 잠이 덜 깬 부은 눈으로 현관문 저편에 남겨지는 내 아내를 생각하며 나는 참았다. AE는 사장의 비위를 맞추려 안달을 했다. 광고의 가장 핵심적인 커트를 들어내자는 사장의 무식에 맞장구를 쳤다. 그는 영리한 사람이다. 그 커트가 그 광고에서 기능하는 역할을 충분히 이해할만큼 영리하고, 동시에 이해하지 못하는 척 연기할 수 있을만큼 영리하다. 내 PD와 내 카피라이터, 내 녹음실 TD와 내 감독, 내 조명 스텝들이 수십 개의 날과 수십 개의 밤을 밝혀 만들어낸 몇 초의 프레임들이 그렇게 휴지통으로 사라지는 궤도에 오른다. 내가 말한다. "지금 여기서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게 저로서도 쉽고 편합니다. 하지만 광고주분들을 위해서, 일억 들여 만드는 광고가 광고답게 온에어 되는 것을 위해서는 솔직히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씀드립니다" 광고팀장이 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반대편 사장의 옆에서 AE는 미간을 찌푸린다. 이 사안은 흐지부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담당 PD는 시사용 디스플레이 옆에서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 소심한 몇 사람들은 방금의 문제가 어떻게 결정된건지 서로서로 묻고 속삭이고 중얼거린다. 사장은 예전의 그 사장이 아니다- 돌아오는 회사 승합차 안에서 AE가 내뱉듯 말한다. 나도 안다. 사장이 일군 그의 회사는 거짓말처럼 짧은 시간 동안 기적처럼 성장해 얼마전 화제를 뿌리며 상장되었다. 상장하고도 콩나무 자라듯 하늘로 치솟는 주가로 그는 이나라에서 손꼽힐만한 부자가 되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십몇위의 작은 광고대행사와 일하고 싶지 않다. 내로라 하는 굴지의 대행사들이 그에게 손을 내밀고 호주머니로 슬쩍슬쩍 선심을 밀어넣는다. 대행사 직원을 '내 식구'라 부르며 밥을 사던 그 사장은 사장실의 저 사장과 더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삭제해선 안될 커트를 삭제하는 게 낫다고 간들거리던 AE와 돌아오는 차 안에선 그 커트를 빼면 안되지- 하고 담당PD에게 알랑거리는 이 AE도 같은 사람이 아니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인가? 당신들은 나와 같은 '사람'인가? 피가 흐르고 뇌로 생각하고 양심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맞는가? 회사로 돌아오자 웃음이 날 만큼 똑같은 형태의 위악이 똑같은 표정을 한 AE들의 얼굴에서 그들의 입으로 튀어나와 내 책상 위로 쏟아진다. 조금 전 만나고온 가엾은 자와 똑같이 사장이라는 명패를 놓고 앉은 다른 광고주의 사장이 토해낸 독선과 무지가 그것을 여과할 능력은 커녕 의지조차 스스로 절제해버린 AE들의 입을 통해 내게 전해진다. 毒이다. 나는 그 독에 녹는다. 숨쉴 수 없는 탁한 독기가 내 공간을 가득 채운다. 나는 그 속에서 십삼년째 일하고 있다. 사람들은 너도 별 수 없다, 너도 달라질 것이다-라고 했다. 저주이거나 충고였다. 다행히 나는 저주받지도, 독살되지도 않고 지금 내 자리에 앉아 있다. 독살되는 대신, 나는 우생론자가 되었다. 인종적, 민족적 우열이 아니라, 정신의 우열을 영혼의 우열을 양심의 우열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손가락질 받아도 좋다. 내가 사람의 팔에 달린 손가락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손가락에라면.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 나는 당신들처럼 살지 않는다. 나는 '사람'이다. 부끄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미안해하며 숨쉬는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살겠노라 마음먹었던 수많은 지침 중 하나는 화났다고 옆의 사람들에게 그 화를 드러내거나 되돌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억양을 연습한 후 최대한 차분히 PD에게 업무를 지시한다. 감독에게 전화하라고 하고, 편집실과 녹음실 스케쥴을 체크시킨다. 예전 내가 선배CD들에게 놀랐던 그 일을 아무렇지 않게, 수십년전부터 해온 것처럼 내가 한다. PD는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봐도 무리한 요구에조차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해보겠노라 대답한다. 아무래도 나는 아직 미숙하다. 내 화를 그가 느끼고 있다. 무서워하고 있다. 화내지 않았지만 나는 화낸 셈이다. PD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다른 업무를 나와 상의한 후 편집실로 나간다. 그는 오늘도 편집실의 불편한 의자에서 꾸벅거리며 밤을 지샐 것이다. 나는 그렇게 또 내 PD의 밤을 잃는다. 그의 간과, 그의 선의와 그의 가족을 잃는다. 몇 살 때였는지는 모르겠다. 다연이가 두 손으로 눈가를 주욱 찢어 올려보이며 "엄마는 화나면 이런 얼굴이 돼"라고 말했다. 나와 아내는 깜짝 놀랐다. 아마 똑같은 이유로 놀랐을 것이다. 나는 부끄러웠다. 내 얼굴도 그렇게 보였으리라. 내가 설득했어야 할 것에게, 내가 보듬어 안았어야 할 내 사람들에게. 순간, 무지와 위선으로 가득찬 사장실에서 느꼈던 살의보다 열 배쯤 치명적인 자괴감이 나를 무너뜨렸다. 십삼년치의 피로가 몰려왔다. 내일 새벽까지 해오라고 했다는 또다른 광고주 사장의 말을 전하는 AE들을 안심시켜 돌려보내고, 매킨토시 앞에 앉은 막내 디자이너와 온라인 바둑을 두고 있는 카피라이터 후배를 한참 바라보다 먼저 들어가겠다고 인사하고 집으로 왔다. 현관문을 여는 기척이 틀림없이 아이의 것이다. 피로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목으로 꿀꺽 삼키고 문을 열었다. 내 딸이 일곱 살의 맑음으로 거기 서있었다. 나는 지하 수퍼마켓에서 사온 아이스크림과 검은콩우유를 내밀고, 신발을 벗고, 안방으로 몇발짝 걸어 코트채 침대 위로 몸을 눕혔다. 졸린 건지, 피곤한 건지, 울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어서 그대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김훈은 그의 소설 머리말에서 말했다. "아득한 적이여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 나는 어느 곳에서 어떤 적을 맞아야 할 지 혼란스러웠다. 장려한 문장도 거친 바다도 없는, 소소하고 궁색한 잔물결만 끝도 없는 일상의 전장에서 내 적은 북을 울리며 강맹한데 나는 정작 혼신의 힘이라도 내어 찌를 한 사람의 적도 찾을 수 없었다. 아이에게 지금도 그 표정을 지어보일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다. 그리곤 금방 그만두었다. 참지 말아야 할 것을 참고 참아야 할 것을 참지 못하는 약한 남자가 거기 있었다. 그래도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 나는 사람이다-라는 자위가 말 그대로 수음처럼 나를 비틀거리게 했다.
현카피
2005-07-11 1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