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필름 해가 보이지 않아도 구름으로 덥힌 도시는 찜통마냥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한낮, 쓸모없는 한담을 나누며 거리를 걸었다. 양손에는 방금 들른 마트에서 주섬주섬 골라온 와인 몇 병과, 바나나 한 송이와 이불 한 보따리, 그리고는 길가에서 천원에 열송이씩 팔고 있는 사과향 나는 장미가 중력의 존재를 증명하며 한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려고 열심이다. -음, 자 살건 다 산것 같고, 우리 집에 가서 삼순이 보면서 밥먹고 놀쟈아 -결국 심부름 시키려고 나 부른거지?-.-^ -하루이틀 당하는 것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비가 올 확률은 80%입니다. 시원한 비가 쏟아졌으면 싶지만 하늘은 찌푸린 구름만 잔뜩일 뿐 기다리던 비는 오지 않는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언덕 하나 정도 넘어야 닿을 수 있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제서야 빗방울이 어깨 위에 한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조금은 어둑어둑해질 시간, 작은 상 위의 먹거리와 방안을 메운 TV소리 너머로 후두둑거리며 빗방울이 쏟아진다. 열린 창 너머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그것만으로도 갈증이 씻기는 것만 같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들고 나선 바깥 세상은 온통 비로 젖어 있다.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발에 흘러드는 빗물과, 우산 바깥 어깨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차가운 느낌이 즐겁다. 비에 젖어 무채색으로 변한 이 회색 도시에 오렌지색으로 아롱지는 불빛들. 흑백필름 몇 장에 색을 잃은 이 도시를 담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에메랄드빛 바람
2005-07-07 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