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례지만 지금 몇 시죠?
시간에 대한 생각은 나 자신이나 혹은 다른 인간들에 대한 생각만큼이나 나에게는 커다란 관심거리이자 중대사이다. 하긴 어느 인간의 사유에서 시간이 간과될 수 있을까. 새로운 계절을 맞으며, 여기저기에서 새로운 포부와 계획들을 늘어놓고 있는 마당에 나는 단지 시간에 대한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나누어놓은 하루, 한 달, 일 년, 일 세기의 시간들은 정말로 딱 한 번 밖에는 발 담글 수 없는 일회적인 강일까. 한 번 지나가 버리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이 시간이라면 그 시작도 끝도 애초부터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인간이 나누어 놓은 수많은 시간에 대한 구획들처럼 태초와 종말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미래 혹은 과거라고 부르는 것들도 마찬가지로 언제까지나 평행선상에 놓여있을 시간의 한 부분을 살다가는 인간이 지구에서의 삶을 기억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든 또 하나의 구획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우리가 믿거나 혹은 부정하는 죽음이라는 것도 다음 단계로의 진입을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그렇다면 삶에 대한 절망과 포기의 수단으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또한 병실에 누워 어린 날의 제 모습을 떠올리며 한 줄기 눈물을 머금은 채 아련히 죽어 간 사람들은 지금 무얼하고 있을까.
지구의 생명체들은 모두 시간에 대해 무지하며 인간도 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항을 대신할만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유일한 존재이다.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인간들이 다른 존재들에 비해 더 잘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우리는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실을 한 번 더 언급했거나 아니면 전혀 새로운 걸 일부러 만들어냈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단의 종결을 위해 스스로도 모순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어제의 시간은 과연 다시 돌아오게 될까. 지구에서의 삶을 끝낸 지도 한참이나 지나버린 먼 미래에 과연 우리는 지나온 시간들을 한 번 더 경험할 수 있게 될까. 모른 척 지나쳐버린 어릴 적 친구의 얼굴과 어느 날 망연히 바라보았던 창밖의 풍경, 울면서 뛰쳐나가던 그 누군가의 모습 앞에 우리가 다시 한 번 서야만 하는 순간이 결국은 오게 되지 않을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만 할까. 그 때의 시간은 과연 내가 지나왔던 그 시간과 동일할까. 나는 그런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을까. 내가 이 만큼이나 무지하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억지로라도 무언가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지금이 언제인지도 모른 채, “실례지만 지금 몇 시죠?”라고 물으며 존재하지 않는 남의 시간에 기대어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