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나는 어느 날 일찍 집으로 귀가한다. 타성에 젖은 일상을 건성으로 접어 넘기듯 끝마치고, 고개를 푸욱 숙인 채 무심코 대문을 통과하던 찰나, 나는 대문 밖에 걸린 한 장의 봉투를 발견한다. 흰 봉투에는 아무런 글씨도 쓰여 있지 않았지만 나는 봉투의 음울한 기운을 손끝으로 감지하며, 그것이 내가 알고 있던 누군가의 부고임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그 때의 나에게 죽음은 이미 익숙하고 귀찮으며 번거로운 무언가에 불과하다. 때문에 나는 몇 장의 만원권 지폐를 챙겨든 채 고인의 생전에조차 한 번 가본 적이 없던 초상집을 찾아 길을 나서야겠다고 결심하지만, 그것은 그의 죽음만큼이나 번거롭고 귀찮은 일에 불과해진다.
나는 이미 죽어버린 혹은 잠을 자는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자꾸만 외면하고 싶다. 마치 사진 속의 저 노인이 건너편의 ‘잠’을 뒤로 자전거를 모는 것처럼.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은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에 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죽은 배우, 죽은 가수, 죽은 작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죽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상당한 양의 글과 말을 소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의 공통된 한계는 그 누군가의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목하기 훨씬 이전부터 지속되어왔던 그의 지난 삶에 대한 이야기로 죽음을 미화한다. 미화된 죽음은 더 이상 탐구되지 못하고, 다만 언급의 수준에 그친다. 이를테면 죽음이라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에 눈이 먼 나머지 엉뚱하게도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는 말이다. 나는 이러한 모습들이 타인의 죽음에 대해 외면하는 것보다 더 냉정하고 불필요한 작업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어느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 마치 그가 잠시동안 잠을 자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꾸만 하품을 하게 된다.